장마 그친 성수동 빨래방의 금붕어와 빛

📅 2025년 08월 14일 07시 01분 발행

장마가 하루 쉬는 듯 고개를 들던 늦은 오후, 성수동 골목의 빨래방 문을 밀고 들어섰습니다. 문 위 형광등이 낮은 소리로 윙 하고 울리고, 드럼통 같은 세탁기들이 일정한 리듬으로 숨을 쉬듯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젖은 우산을 입구 철제 거치대에 기대어 두니 방금 전까지 내리던 비의 냄새가 천천히 증발해 갔습니다. 바닥의 흑백 타일이 비친 불빛을 조용히 반사하고, 유리문 너머로 지나가는 차들의 물자국이 유령처럼 스쳐 갔습니다. 카운터 위에 둥근 유리병 하나가 놓여 있었지요. 그 안에 작은 금붕어 한 마리가 오렌지빛 지느러미를 흔들며 공간을 동그랗게 따라 돌고 있었습니다. 세탁기들의 둥근 창과, 금붕어의 둥근 집, 그리고 장마가 남긴 둥근 웅덩이들. 오늘은 세상이 유난히 원을 그리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어떤 분은 의자에 앉아 낡은 셔츠의 단추를 천천히 달고 있었고, 젊은 학생은 빗방울 자국이 남은 책을 펼친 채 한 줄을 오래 붙들고 있었습니다. 제 옆 세탁기에는 흰 수건들이 물속에서 가볍게 떠오르다가 이내 가라앉기를 반복했습니다. 거품은 하얗게 부풀었다가 곧 허물어지고, 남는 것은 깨끗해진 섬유의 결뿐입니다. 기다림이라는 것이 대체로 이런 모양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손을 대고 싶어도 건드릴 수 없는 시간, 서두를수록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순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기 리듬을 알고 있는, 고집 있는 움직임 말입니다.

뜻밖에,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전도서 3:11). 머릿속에서 오래 머물던 구절이 오늘은 유리 원통 속으로 스며들어, 거품의 가장자리를 따라 잔잔히 빛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반드시 반짝이고 눈부신 순간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세탁 표시처럼 분명한 표징으로 확인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늘의 아름다움은 ‘아직’이라는 단어와 함께 오고, ‘충분히’라는 단어와 함께 머무르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금붕어는 같은 길을 도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매번 조금 다른 깊이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요.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같다가도, 어제와 비슷한 표정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면서도, 마음의 어딘가는 다르게 젖고, 다르게 말라 갑니다. 멀어졌던 관계가 다시 연락처의 위쪽으로 떠오르는 날이 있고, 말하지 못한 사과가 걸레처럼 고단해져 스스로 자리를 찾는 밤이 있습니다. 사랑이란 말도, 회복이란 말도 세탁기의 문을 억지로 열 수 없다는 상식과 닮아 있습니다. 아직 물이 차 있고 회전이 한창일 때 무리하게 손잡이를 당기면, 쏟아지는 물과 함께 되돌아와야 할 시간까지 바닥에 흩어집니다. 어쩌면 용서는 ‘문이 저절로 풀리는 순간’을 믿고 기다리는 일과도 비슷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옆 의자에 앉아 서로의 젖은 마음이 덜 무거워지길 바라며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것일지 모릅니다.

빨래방엔 늘 따뜻한 냄새가 있습니다. 삶아낸 면에서만 나는 묵직하고 다정한 온기. 어린 시절, 겨울 해가 일찍 지던 날 어머니가 난로 위에 널어 말리던 수건의 냄새와 닮았습니다. 그 냄새는 늘 이야기를 데려옵니다. 누구나 자기만 아는 이야기가 한두 가지씩 있고, 그 이야기들은 대개 비에 젖어 무거워진 다음에야 조심스레 꺼내지곤 합니다. 드럼 속에서 수건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둔탁한 소리가 마음의 속삭임처럼 들렸습니다. 오늘 여기 모인 각자의 사연이, 섬유 사이사이로 묻어 있던 하루의 먼지가, 물속에서 천천히 풀어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문이 ‘딸칵’ 하고 풀리는 소리가 들리자, 모두의 시선이 잠깐씩 그쪽으로 갔습니다. 문을 연 사람의 얼굴에 안도 같은 빛이 스쳤습니다. 따뜻한 김이 허공으로 올라가며 안경을 희미하게 흐리게 만들고, 손에 들린 타월에서는 햇빛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햇빛 같은 온도가 났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의 기도도 이렇게 조용히 끝났을 것만 같았습니다. 긴 설명 없이, 의식하지 못한 간구들이 마침표에 닿아, 이제 꺼내어 개면 되는 때를 선물받는 일이 삶 속에 분명히 있구나 싶었습니다.

금붕어가 한 번 더 원을 그리더니 잠깐 멈춰, 마치 밖을 본다는 듯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작은 멈춤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붙들었습니다. 돌고 도는 일상 중에도 이렇게 한 번 멈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이 있다면, 비로소 무엇이 씻겨 나갔는지, 무엇이 남아야 하는지 알 수 있겠지요. 밖으로 나오니 비 냄새 속에 햇살의 냄새가 아주 옅게 섞여 있었습니다. 젖은 길 위로 자동차가 지나가며 가는 물무늬를 남기고, 그 무늬가 금세 사라졌습니다. 오늘도 각자의 드럼은 어딘가에서 돌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천천히 맑아지는 시간을 서로에게 허락할 수 있다면, 장마 뒤 공기처럼 마음이 가벼워지는 순간이 언젠가 우리에게도 찾아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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