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앞 벤치와 초록 유리컵의 새벽

📅 2025년 08월 17일 07시 01분 발행

여름 새벽 공기는 아직 하루의 무게를 배우기 전의 학생처럼 얌전히 서 있었습니다. 우체국 앞 벤치에 조용히 앉아 초록 유리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습니다. 컵 겉면에 맺힌 물방울이 손바닥을 적시다가 이내 흘러내리고, 바닥의 작은 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은 시간, 빛도 소리도 얇게 깔려, 마음이 제 얼굴을 알아보는 때가 되지요.

멀리서 우체국 차량이 들어오는 낮은 엔진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턱을 넘을 때마다 상자들이 살짝 흔들리고, 스티커 붙인 면면이 새벽의 희끗한 빛을 받았습니다. 누군가의 환갑 축하 속삭임, 오랜 출장 끝의 안부, 생각보다 무겁게 담긴 사과 한 상자, 미처 전하지 못한 미안함과 조심스러운 사랑이 저 안에 섞여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낮이 되어 이 문을 드나들며 각자의 마음을 봉투에 넣어 보낼 테지요.

우체국 벽면에 붙은 오래된 안내문이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습니다. 글자들은 간결했고, 화살표는 정확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런 단정함 속에서 더 많은 여백이 느껴졌습니다. 마음이 지쳤을수록 사람은 설명을 바라지만, 실제로 우리를 붙잡아 주는 건 설명 너머의 온기일 때가 많습니다. 초록 유리컵에 든 물을 한 모금 머금으니, 유리 특유의 차가움이 혀끝을 맑게 스쳤습니다. 아무 향도 없는 물이 이런 때에는 가장 정직한 위로가 됩니다.

어젯밤, 잠들지 못한 기억이 있으셨을지요. 차마 송곳 같은 문장을 누군가에게 건네지 못하고, 서랍 속에 접어 넣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체국 앞에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쓰지 못한 편지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읽히고 있는 건 아닌지. 보내지 못한 사연이 허공에 흩어지는 법이 없다는 믿음, 그것만으로도 새벽 공기의 얌전함이 더 깊어졌습니다.

이른 시간에 홀로 깨어 있으면 때로는 외로움이 앞서다가도, 어느 순간 작은 소리 하나가 마음의 균형을 잡아 줍니다. 바퀴가 천천히 구르는 소리, 먼지 쓸리는 소리, 누군가 인사 대신 내는 짧은 기침 같은 소리들. 그 속에 삶의 텀이 생깁니다. 급히 넘기던 날들의 페이지가 잠시 멈추고, 우리가 하나의 문장을 끝맺는 법을 다시 배웁니다.

사도 바울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너희는 우리의 마음에 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후 3:2)”. 우체국 앞 벤치에서 이 구절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사람마다 어딘가에 우표처럼 조용히 붙어 있는 표정이 있고, 봉함된 마음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아직 봉인을 뜯지 않았고, 누군가는 이미 읽히다 덮였습니다. 그래도 우리 안에서는 계속 문장이 자랍니다. 누가 써 주는지 모를 때가 많지만, 묵묵히 손을 잡아 주는 문장들이 있습니다.

초록 유리컵을 비우고 나니 바닥에 동그란 물자국이 생겼습니다. 곧 증발해 사라질 그 흔적이, 오늘 하루를 버티게 하는 근거처럼 느껴졌습니다. 무언가가 분명히 여기에 있었다는 증거. 사라지더라도 없어지지 않는 것들, 사랑과 기다림, 그리고 감사 같은 것들이 그랬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오히려 더 넓게 퍼져 우리의 공기를 바꿉니다.

첫 출근을 앞둔 이의 신발 소리, 꽂아 두었던 국기 끝의 가느다란 떨림, 상자 모서리에 밴 종이 냄새. 감각들이 차례로 자리 잡자, 마음속 여러 봉투들도 차분히 정리되는 듯했습니다. 누구에게 보낼지 몰라 쌓아 둔 문장들이 서로 등을 맞대고 눕습니다. 꼭 답장이 와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때로는 보낸 마음보다 받은 고요가 더 오래 우리를 살립니다.

해가 조금 더 올라, 우체국 유리문에 아침빛이 오래된 지도처럼 펼쳐졌습니다. 배달원 한 분이 모자를 고쳐 쓰고, 차에 오르기 전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셨습니다. 그 표정이 묘하게 안심을 주었습니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고, 그러나 각자의 길은 분명했습니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도착할 이야기들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벤치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컵을 바라보았습니다.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사물처럼, 마음도 그래 보였습니다. 이미 건네진 것과 아직 쓰지 못한 것이 한자리에 있었습니다. 독서자님의 하루에도 그런 자리 하나쯤은 남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 자리에서, 우체국 트럭이 멀어지는 소리와 함께, 당신 안의 편지가 조심스레 읽히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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