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의 저울 앞에서

📅 2025년 08월 31일 07시 01분 발행

오후 느지막이 작은 동네 우체국에 들렀습니다. 낮게 깔린 형광등 아래, 번호표가 얇은 종이 소리로 뽑히고, 창구 너머에서는 도장이 착착 박히는 소리가 리듬처럼 이어졌습니다. 몇 발짝 앞, 투명한 칸막이에 비친 제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봉투에 적어 놓은 주소를 한 번 더 읽었습니다. 맞춤법은 틀리지 않았는지, 이름의 한 획은 빠지지 않았는지, 조심스러운 마음이 글씨 사이로 스며 있었습니다.

차례가 되어 작은 상자를 저울 위에 올려놓자, 화면에 숫자가 깜박이며 자리를 잡았습니다. 직원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무게와 요금을 확인하고, 이 정도면 등기가 안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짧은 순간, 문득 제 마음도 이렇게 재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날 며칠 내려놓지 못한 걱정이 어느 정도의 수치로 나타난다면, 내일의 계획은 어느 정도 가벼움으로 표기된다면, 삶이 더 명확해질까요. 같은 상자라도 무엇을 담았는지에 따라 우리에게 느껴지는 무게가 달라지듯, 같은 하루라도 그 안에 품은 사연에 따라 몸이 더 무거워지기도, 뜻밖에 가벼워지기도 하겠습니다.

우체국을 나서며 영수증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손에 남은 종이의 거친 촉감이 이상하게 안심을 주었습니다. 보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마음과 몸 사이에 얇은 칸막이가 하나 더 생기는 것 같습니다. 책임을 피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이제는 길 위에서 해야 할 몫이 시작되었다는 확인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떠나가는 상자처럼, 우리가 건네는 말들도 길을 떠나 어느 순간 누군가의 손에 닿겠지요. 잘 도착할지, 오래 머물지, 금세 잊힐지는 알 수 없지만, 건넴이 시작될 때 관계는 다시 움직입니다.

문득, 보내지 못한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미안하다는 짧은 문장, 고맙다는 한 줄의 인사, 차마 묻지 못한 질문. 마음속 서랍에 접혀 있는 작은 쪽지들이 오늘도 자리만 바꾸고 있었습니다. 우표를 붙이는 일은 늘 값이 매겨집니다. 그러나 그 값에는 상자의 재질만 아니라, 우리가 담은 망설임과 용기도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게 따져보면, 관계의 우편요금은 늘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한 번 건네진 마음은 종종 예상보다 멀리, 그리고 조용히 가 닿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짐을 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편 55:22). 이 말씀이 삶에 스며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포장지로 반듯하게 싸지 못한 마음, 모서리가 울퉁불퉁해 테이프가 붙지 않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분 앞에서는 부자연스러움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더군요. 저울의 숫자는 무게를 알려주지만, 하나님은 이유를 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유를 들어 주시는 동안, 무게가 변하는 때가 있습니다. 같아 보이는 하루인데도 발걸음의 보폭이 달라지고, 같은 계단인데도 호흡이 덜 가빠지는 때가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 손에 들고 있던 빈 상자는 점점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적잖은 것들이 이미 떠났기 때문일까요. 떠났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닌 듯합니다. 보내진 것들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우리와 이어지고, 언젠가 다른 형태로 답장을 건네기도 하니까요. 마음의 저울은 수시로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까지 포함해 우리를 붙들어 주는 손길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날에는 오늘의 수치가 크든 작든, 삶의 방향은 조금 더 단단해집니다.

오늘, 창구의 작은 화면 대신 마음 깊은 곳에 조용히 찍힌 한 문장이 떠오릅니다. 접수되었습니다. 그 문장이 보이지 않는 영수증이 되어 주머니 속에서 온기를 내는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나눔과 기다림이 차분히 이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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