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우체통과 마음의 빈칸

📅 2025년 09월 01일 07시 01분 발행

동네 우체국 옆, 페인트가 조금 벗겨진 빨간 우체통 앞에서 잠시 멈추었습니다. 투입구가 반쯤 열린 채 낮은 금속성 소리를 품고 있었고, 누군가 막 넣고 간 두툼한 봉투가 안쪽 어둠 속으로 천천히 미끄러지듯 사라졌습니다. 그 둔탁한 한 번의 울림이 이상하게도 오래 미뤄 둔 마음의 일들을 불러내었습니다. 말로는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정작 글자로 옮기려 하면 서두를 수 없던 인사, 사과, 감사 같은 것들 말입니다.

편지는 쓰는 동안에 보낸 이의 온도를 닮아 갑니다. 종이에 번지는 잉크처럼, 마음의 머뭇거림과 숨 고르기가 글자 사이에 스며듭니다. 빠르게 전해지는 메시지가 넘쳐나는 시대에도, 어느 누군가는 여전히 한 장의 종이를 골라 우표를 붙이고, 주소를 또박또박 적습니다. 그 느린 절차가 괜스레 소중해 보였습니다. 건네고 싶은 마음을 다듬는 시간, 문장을 지우고 고쳐 쓰는 사이에 스스로의 얼굴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해 주니까요.

오늘 저는 오래 연락하지 못했던 분에게 엽서 한 장을 썼습니다. 할 말은 많았지만 다 쓰지 않았습니다. 몇 줄 옆에 일부러 빈칸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 빈칸이야말로 읽는 이의 오늘을 머물게 할 자리 같아서였습니다. 다 채우지 않아도 괜찮은 날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그런 여백이 있어야 숨이 붙습니다.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 설명하지 않기로 한 부분을 하나님께 맡겨 두는 일, 그것이 제게는 작은 신뢰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지요(고린도후서 3:2). 종이와 봉투가 없어도, 우리의 표정과 말투, 발걸음과 손의 움직임이 하루 내내 누군가에게 닿습니다. 계산대에서 건네는 영수증의 끝, 엘리베이터에서 잠시 마주 친 눈빛, 계좌이체의 메모란에 남긴 짧은 문장이 모두 하나의 필체가 됩니다. 오늘의 저는 어떤 글씨체로 읽힐까요. 서두른 흔적이 가득한지, 한 번 더 멈추어 읽어 준 자국이 있는지, 제 마음 스스로 먼저 묻고 싶어졌습니다.

우체국 창구 뒤편에 정돈된 칸칸의 사서함을 보면서, 이름의 자리라는 것이 얼마나 분명한지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빗금 하나까지 맞추어 끼워 넣지 않으면 우편물이 삐져나오듯, 마음에도 자리가 있고 때가 있습니다. 맞지 않는 때를 억지로 밀어넣을 때 생기는 구김이 우리를 오래 괴롭히곤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덜 말하고, 덜 채우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답장이 늦을 때 마음은 쉽게 접힙니다. 우체통은 바로 열리는 장치가 아니라는 사실이 문득 위로가 되었습니다. 봉투 하나가 제자리에서 떠나 우편함에 도착하기까지, 분류대를 돌고, 낯선 손들을 거쳐, 몇 차례의 밤을 지나야 합니다. 기도도 사랑도 그와 닮아 있는 듯합니다. 금세 돌아오지 않아도 소멸되지 않고, 느리게 경로를 통과하며 모양을 갖춥니다. 기다리는 동안 보내는 이의 마음이 깊어지고, 받는 이의 때가 무르익습니다. 늦음이 부재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오늘 저는 우체통 앞에서 배웠습니다.

엽서에 우표를 붙일 때 손끝에 남는 미세한 끈끈함이 한참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전처럼 혀끝으로 적시지는 않지만, 대신 접착면의 잔여가 손가락에 얇은 막을 씌웠습니다. 관계의 선택이 남기는 촉감도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에게 붙어 서 있으려면 작은 끈기와 책임이 필요하고, 혹여 떼어 내야 할 때가 오더라도 너무 성급히 떼면 종이가 찢어지듯 마음이 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천천히 고백하고, 더 신중히 침묵합니다. 그 느린 리듬이 우리를 지켜 줍니다.

집으로 돌아와 우편함을 열어 보니 공과금 고지서들 사이로 손글씨가 담긴 작은 봉투가 하나 끼어 있었습니다. 제 이름을 정확히 적은 필체가 이상하리만치 따뜻했습니다. 살아 있다는 감각은 때로 이렇게 도착합니다. 숫자들 사이에 놓인 한 사람의 마음, 그게 오늘을 버티게 합니다. 언젠가 제 엽서도 어딘가의 우편함에서 그런 온도로 발견되겠지요.

우체통의 문이 닫힐 때 울리는 둔탁한 소리가 금세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묵묵한 침묵이 남았습니다. 소리는 멈췄지만, 보내진 마음은 계속 길을 갑니다. 우리의 하루도 아마 그럴 것입니다. 소란은 지나가고, 남은 여백을 통해 의미가 스며듭니다. 그 여백이 오늘을 다르게 들리게 해 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조용히 따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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