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 문 닫는 시간의 온기

📅 2025년 09월 02일 07시 01분 발행

골목 끝 세탁소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하루의 마지막 숨을 돌리는 듯합니다. 셔츠들이 길게 걸린 채 미세하게 흔들리다 어느 순간 가만히 멈추고, 다리미판 위에서 일어나던 부드러운 김도 잦아듭니다. 탈수기의 둥근 창에는 물방울이 한동안 붙어 있다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바닥의 얕은 빛깔 위로 작은 점들이 소리를 남기지 않은 채 스며듭니다. 형광등의 하얀빛은 조금 누렇게 변해 가고, 계산대 위에는 종이 영수증이 가볍게 겹쳐져 있습니다. 누군가는 오늘 맡겨진 옷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쓰다듬고, 이름표가 제대로 붙었는지 확인합니다.

하루 종일 우리 몸에 닿아 있던 옷처럼,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습기가 머뭅니다. 잔잔하게 맺혔던 서운함, 다 풀지 못한 말의 매듭, 내 의도와 다르게 전해졌을지 모르는 표정 하나. 누구에게 말하기 어려워 가슴 안쪽에 접어 넣어둔 감정들이 저마다의 물기를 품고 있습니다. 세탁소의 온기는 그것들을 다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어떤 것들은 따뜻한 공기만으로도 스스로 주름을 펴고, 어떤 것들은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마릅니다.

탈수기의 마지막 떨림이 잦아들 때 찾아오는 고요가 있습니다. 그 고요 속에서야 비로소 옷감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처럼, 소란이 가라앉아야 선명해지는 마음의 결이 있습니다. 오늘 내 안을 한 바퀴, 또 한 바퀴 돈 생각들이 멈추면, 남는 것은 몇 줄의 진심과 이름 하나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름표처럼 작고 단단한 어떤 확신, 나를 잊지 않는 손길에 관한 기억 말입니다.

낡은 옷에도 간직된 향이 있듯, 마음의 낡은 자락에도 지워지지 않는 호의가 있습니다. 때로는 쉽게 더러워지고, 때로는 이유 모를 얼룩 앞에서 망설여지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다정한 손길이 주는 온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름을 불러 제자리를 찾아주듯, 보이지 않는 분의 시선이 우리를 놓치지 않으신다는 조용한 믿음이 떠오릅니다. “너는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음이라”(이사야 43:4). 세탁물의 작은 꼬리표처럼, 그 말이 마음 안쪽 포켓에 붙어 있는 밤입니다.

주머니에서 발견되는 자잘한 먼지, 잊고 있던 영수증 조각, 손끝에 남는 비누 냄새까지도 오늘의 일부였습니다. 완벽하게 깨끗해진다는 말 대신, 충분히 건너왔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날들이 있습니다. 남은 물기가 있어야 내일의 바람도, 햇살도 제자리를 찾습니다. 너무 급하게 말리다 자칫 상해 버리는 옷감이 있듯, 우리 삶에도 서둘지 않아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을 탓하기보다, 아직 말라 가는 중이라는 사실이 위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세탁소의 문이 닫히고, 유리문 안쪽의 불빛이 하나씩 꺼집니다. 그 불빛이 꺼진 자리에는 이상하게도 온기가 더 오래 남습니다. 오늘이라는 일이 끝났다는 표시라기보다, 내일을 위해 조용히 접어 두는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길을 걷다 무심코 유리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 오늘 들고 다닌 무게가 고르게 나뉘어지는 듯합니다. 다 털어내지 못해도 괜찮고, 다 밝혀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직 건조대에 남은 온기가 우리를 덮고 있으니, 미완의 마음도 제때를 만나겠지요.

언젠가 주인이 손수 다린 셔츠를 조심스레 비닐로 감싸 내어주듯, 하루가 우리를 살포시 감쌉니다. 한 번 더 살아 볼 힘을 남겨 둔 채로. 내일 아침, 문 앞 햇살과 함께 이름이 다시 불릴 때, 우리는 또다시 제 옷걸이를 찾아 걸리겠지요. 큰 소리 없이도 삶은 그렇게 말리고, 우리는 그렇게 입혀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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