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하는 물의 시간

오늘 오후, 동네 세탁소 유리문 너머로 둥근 드럼이 천천히 돌고 있었습니다. 투명한 창을 통해 비누 거품이 별무리처럼 모이고 흩어지며, 젖은 천들은 제 무게만큼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주인 어르신은 작은 스푼으로 세제를 정확히 덜어 넣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요.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42분이라는 숫자가 전광판 위에 뜨고, 저는 의자에 앉아 그 회전의 숨을 들었습니다.

드럼이 한 바퀴 돌 때마다, 주머니에서 나온 동전 하나가 조용히 부딪히는 소리가 났습니다. 구겨진 영수증 조각이 물살에 풀려 글자처럼 흩어졌다가, 필터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한 번 입고 잊어버린 단추가 반짝이며 잠깐 모습을 비쳤습니다. 사소한 것들이 모두 물의 품으로 가라앉는 동안, 마음속에서도 자꾸만 꺼내지지 않던 작은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말하지 못해 접어 넣었던 후회, 급히 적었다가 지워버린 계획, 주머니 깊숙이 숨어 있던 누군가의 이름 같은 것들 말입니다.

삶에도 이런 회전이 있는 듯합니다. 설명할 틈도 없이 굴러 들어온 얼룩들이 있습니다. 급하게 마신 커피가 남긴 자국, 안간힘으로 참아낸 눈물의 소금기, 일터에서 돌아온 저녁의 냄새. 우리는 종종 그것들을 감추려고 겹겹이 접고 또 접지만, 어느 날엔 한 번쯤 물과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탁기는 세게 문지르지 않습니다. 물의 온도와 회전의 인내로, 천을 다그치지 않고 풀어 내립니다. 그 부드러움이 저는 좋습니다. 말로 설득하지 않고, 그냥 함께 돌며 천천히 낡은 힘을 놓게 합니다.

주인 어르신은 건조기의 시간을 늘 들쭉날쭉하게 올려 놓지 않습니다. 두툼한 커튼이면 더 오래, 얇은 셔츠면 짧게. 각자의 무게와 재질이 정직하게 시간을 결정합니다. 사람도 그렇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겉으로 비슷해 보여도, 속의 실결이 다르고 젖은 사연의 무게가 다릅니다. 누군가의 회복이 더디다 해서 게으른 것은 아니고, 빨리 마른다고 해서 더 가벼운 것은 아닌 것처럼요. 필요한 만큼의 열과 바람이 지나가야 합니다.

드럼이 도는 동안, 리듬이 몸속으로 들어옵니다. 흉골 뒤편에서 뛰는 심장과 어딘가 닮았습니다. 둥근 회전은 어제의 실패를 가로지르지 않고, 그 속을 통과해 지나갑니다. 거품은 크게 부풀다가 금세 가라앉지만, 향기는 남아 천천히 퍼집니다. 애가 3장 23절의 말처럼, 주님의 인자와 긍휼은 아침마다 새롭다고 했습니다. 새로움은 번쩍이는 일이 아니라, 이렇게 물과 시간과 냄새로 스며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제 마음의 주머니를 더듬어 봅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자리에서 구겨진 메모 한 장을 꺼내 놓는 일. 그 위에 따뜻한 물줄기를 흘려보내고, 매듭을 힘주어 당기지 않고 살짝 흔들어 풀어 보는 일. 누군가를 미워한 마음 뒤에 남아 있던 서늘한 말 한마디가, 물속에서 종이처럼 풀어져 흐려지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칼날 같던 모서리가 둥글어질 수는 있겠지요.

건조기 문이 열리면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감싸 옵니다. 주인 어르신은 옷의 모서리를 맞대어 조심스레 접습니다. 완벽한 각은 아니어도, 제자리를 찾아 겹쳐지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사람의 숨결도 그렇게 접히면 좋겠습니다. 다 펴지지 않는 주름은 주름대로 남고, 그래도 오늘을 입고 나갈 수 있을 만큼의 질서가 생겨나는 것. 남의 눈에 깨끗해 보이기 위한 반듯함이 아니라, 다음 걸음을 견딜 수 있는 단단함 같은 것 말입니다.

문밖으로 나오니 늦여름의 공기가 낮게 깔려 있었습니다. 팔에 얹힌 빨래 봉투가 미지근했습니다. 그 온기가 오래가진 않겠지만, 돌아서는 길은 이상하게도 가벼웠습니다. 세탁소의 둥근 창 안에서 아직 돌아가고 있는 다른 드럼들을 잠깐 더 바라보았습니다. 누구의 시간도 서로의 시간을 대신해 줄 수 없지만, 저 회전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부드러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이라는 드럼이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그 속에서 꼭 붙잡고만 있던 한 조각이 조용히 풀려 나와, 물과 함께 조금 멀어졌으면 합니다. 남은 자리에는 향기 한 줄기가 번져, 저녁의 공기와 닿으며 잠잠히 사라지기를 바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