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라벨을 떼는 손길

📅 2025년 09월 05일 07시 01분 발행

해가 완전히 오르기 전, 아파트 1층 분리수거장에는 주방등 같은 노란 불빛이 먼저 깨어 있습니다. 유리병끼리 닿아 맑은 소리를 내고, 캔을 누를 때 숨이 빠져나가는 듯한 바스락이 따라옵니다. 손끝에는 미지근한 물기와 설탕의 끈적함이 함께 묻어 있고, 라벨의 가장자리를 찾아 손톱으로 살짝 들어 올리면 글자들이 조각나 떨어집니다. 접착제의 얇은 막이 빛을 받아 은근히 반짝입니다. 물을 조금 더 적시니 남은 끈이 서서히 풀리며 병은 투명해집니다. 분류함에 내려놓을 때 나는 가벼운 소리 속에, 빈 병이 자기 자리를 찾는 안도감이 스며 있습니다. 이른 발걸음으로 내려온 이웃 한 분이 플라스틱을 말없이 두고, 눈웃음으로 안부를 건넵니다. 말도 적고, 소리도 적은데 이상하게 마음이 넉넉해지는 시간입니다.

이 장면을 떠올리면 사람의 하루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라벨을 붙였다 떼며 살아갑니다. 역할과 직함, 기대와 체면, 마음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붙인 변명과 다짐. 어떤 라벨은 우리의 자리를 찾게 하지만, 오래 붙어 있던 말들은 끈적함을 남깁니다. 누군가의 성급한 판단, 나 스스로에게 붙인 거친 표제어들. 거기에 손끝을 대어 조심히 떼어내는 새벽이, 누구에게나 가끔은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날에는 시간을 더합니다. 미지근한 물처럼 기다림이 스며들면 접착이 느슨해집니다. 관계의 미세한 오해, 오래된 서운함, 스스로 향해 던진 단단한 말들이 한 번에 사라지지 않아도, 빛과 바람을 통과하면 윤기가 돌아옵니다.

캔을 밟아 평평하게 만드는 일도 눈여겨보게 됩니다. 작아지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배려일 때가 있습니다. 조금 낮아질수록 더 많은 것들과 나란히 있을 수 있습니다. 큰 소리에 밀려 잊힌 마음도, 이렇게 작고 단정한 자리 하나가 생기면 숨을 돌립니다. 분리한다는 것은 버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합당한 자리를 찾아주는 다른 이름일지도요. 버려진 것과 비워진 것은 다르다는 생각이 뒤따릅니다. 빈 병은 내용물을 잃은 것이 아니라, 다음 용도를 위해 비워진 것입니다. 마음도 그렇습니다. 비워진 자리에는 새로움이 머물 자리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큰 자루에 한데 쓸어 담지 않으십니다. 빛 아래 두고 천천히 읽으시고, 닿은 자국까지 기억하십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태복음 10:30). 그 손길은 분류가 아니라 돌려줌에 가깝습니다. 이름표의 문장으로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리게 하는 시선. 그래서인지 정돈된 칸 사이를 지날 때, 마음은 이유 없이 가벼워집니다.

아침 공기는 아직 서늘하고, 분리수거장은 잠시 텅 비었습니다. 칸칸이 비워진 틈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낮은 소리를 만들고, 갈색 병과 초록 병, 투명한 병이 각자의 빛을 품고 서 있습니다. 그 사이를 지나는 걸음에, 마음 한쪽에도 작은 칸 하나가 생겨나는 듯합니다. 라벨이 아닌 이야기로 서 있을 자리. 오늘의 일과가 조금 덜 무겁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끝에도, 조용히 붙어 있던 무언가가 부드럽게 떨어져 나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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