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 아래, 천천히 떠오르는 것들

📅 2025년 09월 09일 07시 01분 발행

동네 큰길에서 한 블록 들어가면 간판 색이 바랜 작은 사진관이 있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찍고 지우지만, 그곳 안쪽에는 여전히 붉은 등 하나 켜진 방이 있습니다. 문턱을 넘으면 약품 냄새에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섞여 어릴 적 앨범을 펼칠 때의 기분이 떠오릅니다. 사진관 주인은 말이 적고 손이 느립니다. 그 느린 손길 사이로 한 장의 흑백 사진이 현상액 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모습을 가만히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보다 조금 더 무거운 어둠이 그릇을 채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잠시 지나면, 어둠 속에 점 하나가 생기고 선이 걸어 나오고, 고개를 기울이면 누구의 눈처럼 보이는 자리가 생깁니다. 아직 희미하지만 분명히 어떤 얼굴이 거기에 있습니다. 빛이 지나간 흔적이, 물과 시간의 도움을 받아 세상으로 돌아오는 순간입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손을 흔들거나 불을 밝히면 사진이 상한다고 주인은 말하곤 했습니다. 어둠도 필요한 시간이라는 뜻이겠지요. 더디지만 그 시간을 통과해야 밝음이 제 자리를 찾는다는 사실을, 작은 사진 한 장이 몸으로 말해 줍니다.

삶도 가끔 그런 모양을 닮아 있습니다. 어제의 기도, 오늘의 한숨, 한 번 더 참아 낸 말 한마디가 당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의 그릇 안에서 조용히 현상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선명하지 않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멀어진 것도 아니겠지요. 빛은 이미 지나갔고, 우리에게 남은 몫은 기다림과 물소리뿐일 때가 있습니다.

현상액 옆에는 고정액이 있고, 그 다음에는 긴 세척이 이어집니다. 흐르는 물에 사진을 오래 담가 두면, 남아 있던 불필요한 것들이 서서히 떠내려갑니다. 마음에도 그런 시간이 있습니다. 하루의 모난 말들이 물에 풀리듯 느슨해지고, 억울함의 찌꺼기가 모래처럼 바닥에 가라앉는 때가 있습니다. 억지로 잊으려 할수록 선명해지던 장면들이, 물소리와 함께 말 없이 멀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조용한 세척이 끝나야 사진이 오랫동안 빛을 견딘다고 주인은 덧붙였습니다. 사랑도, 믿음도 아마 오래 견디려면 이런 물길을 지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필름은 찍히는 순간 이미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읽히기까지는 어둠과 기다림, 물과 손의 온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지만, 때로는 우리를 어둠 속에 잠깐 두시기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는 오래된 말씀이 그 붉은빛 아래서 더 또렷이 들립니다. 가만히 있는 일이 가장 어려운 날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 자리에 머물러 주는 한 줌의 인내가, 우리 각자의 사진을 상하지 않게 지켜 주는 장치처럼 느껴집니다.

붉은 안전등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빛으로 방을 비춥니다. 그 빛 아래서는 사물의 색이 모두 다른 이름을 갖게 되고, 익숙한 얼굴도 낯설게 보입니다. 낯섦은 때로 우리를 서늘하게 하지만, 그 서늘함 덕분에 평소 지나친 것들을 다시 본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꾸로 걸린 필름에서 뒤집힌 세계를 바라보듯, 우리가 놓친 방향이 있었다면 그 시간에 살짝 수정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현상액 속을 천천히 지나는 장면들이 몇 가지 떠오릅니다. 나에게 건네진 한 사람의 웃음, 소매 끝에 묻은 가을 흙, 전화기 너머의 침묵, 그리고 말끝에 남겨 둔 작은 미안함. 이 모든 것이 아직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어느 날, 물에서 건져 올린 사진처럼 또렷해져 손에 잡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비로소 오늘의 의미가 눈을 맞추어 올 수 있겠습니다.

사진관을 나서니 바깥의 하얀 대낮이 잠시 낯섭니다. 붉은빛에 익숙해진 눈이 서서히 본래의 색을 되찾습니다. 마음도 그렇게 천천히 밝아지는 법을 배워 가는 중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잘 드러나지 않았던 선과 얼룩과 빈자리까지, 결국 하나의 얼굴이 되어 우리를 맞이하겠지요. 다 마르지 않은 사진처럼 조심스러운 시간, 그 여백 속에 오늘의 숨이 고여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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