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울과 번호표 사이

📅 2025년 09월 12일 07시 01분 발행

동네 우체국의 오전은 유리문이 닫힐 때마다 작은 파도가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서늘한 공기와 테이프 냄새, 고무 도장 찍히는 소리의 규칙적인 박자. 탁, 탁. 사람들은 각자의 꾸러미를 품에 안고 서 있었고, 몸짓마다 사연이 비닐 속에서 조용히 숨 쉬는 듯했습니다. 번호표 한 장이 손끝에 말려 작은 고리처럼 감기자, 기다림의 호흡도 그 모양을 따라 천천히 둥글어졌습니다.

저울 위로 봉투가 놓일 때, 숫자가 소수점까지 또렷하게 올라옵니다. 어쩌면 하루도 저렇게 저울에 올려 재고 싶을 때가 있지요. 내가 건넨 말의 무게, 서둘러 덮어버린 서운함의 무게, 누군가에게 보내지 못한 안부의 무게. 하지만 창구 너머 직원의 눈웃음이 말해 주듯, 실제로 중요한 건 무게표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마음의 행선지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디로 가나요?”라는 친절한 물음은, 실은 “누구에게 닿기를 바라시나요?”라는 다정한 번역으로 들렸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 손을 잡고 이곳과 비슷한 우체국에 간 기억이 있습니다. 대기표 숫자가 느리게 올라가던 그 시간, 저는 바닥의 타일 무늬를 세며 순서를 기다렸지요. 차례가 오자 아버지는 봉투를 두 손으로 올리고, 도장이 찍히는 소리에 맞춰 아주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 짧은 눈 감음에는, 먼 곳에 있는 누군가의 안부를 향한 마음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창구 앞에 서자, 그때의 미세한 침묵이 다시 제 어깨에 내려앉는 듯했습니다. 많이 바쁜 하루였지만, 우체국의 박자에 맞춰 제 마음도 잠시 느리게 걸었습니다.

누군가는 소포 상자에 작은 과자를 넣었고, 누군가는 새로 찍은 사진을 넣었겠지요. 저는 오늘, 미안함을 한 조각 접어 넣고 싶었습니다. 서둘러 지나온 날들 사이에 놓치고 간 표정들, 마르지 못한 말들의 가장자리. 투명 테이프를 한 번 더 감아 모서리를 부드럽게 가리듯, 은총은 때때로 우리가 다듬지 못한 마음을 조용히 싸매 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저울은 무게를 가늠하지만, 사랑의 저울은 방향을 정해 줍니다. 어디로 가는지, 누구에게 닿는지, 그리고 그 길에서 무엇이 내려놓아지는지.

번호표 종이가 가볍게 달랑거릴 때, 스스로에게도 묻고 싶어졌습니다. 오늘 내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바쁜 일정의 줄 사이, 빈칸처럼 남겨 둔 작은 칸이 하나 있다면 거기에 이름을 적고 싶었습니다. 생각나는 얼굴을 하나 떠올리고, 오래 미뤄둔 인사를 마음으로 먼저 보내 보았습니다. “너희의 염려를 그에게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창구 위에 올려둔 봉투처럼, 염려라는 이름의 꾸러미도 언젠가는 맡길 곳이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내 차례가 되어 창구 앞에 서자, 직원은 여느 때처럼 “다음 분”이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그 말이 오늘은 다르게 들렸습니다. 마치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며,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준비된 만큼만 건네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영수증을 받아 들고 돌아서는 길에 뒷주머니에서 번호표를 꺼내니, 작은 종이 한 장이 이상하게 따뜻했습니다. 그 종이는 누가 먼저인지 경쟁을 정하는 기호가 아니라, 서로에게 순서를 내어 주는 약속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체국 문을 나서자 햇빛이 낮게 기울어 카운터 유리 위에 긴 사각형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금방 잊힐 풍경이지만, 오늘은 오래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저울과 번호표 사이 어딘가에서, 한 사람의 마음이 멀리 떠나가는 누군가에게 가만히 닿아 가는 장면. 그 사이에 서 있던 저는, 낡은 모서리를 도닥이는 테이프 소리처럼 조용한 위로를 들은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우리 각자도 누군가의 창구에서 그렇게 불리겠지요. 이름으로, 사랑으로. 오늘의 무게 대신 오늘의 방향을 생각해 보게 하는, 짧고 충분한 기다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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