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선반 위의 장갑 한 짝

📅 2025년 09월 15일 07시 01분 발행

장을 보고 돌아와 가방을 비우다 보니 바닥에서 장갑 한 짝이 나왔습니다. 계절이 바뀌어 한동안 잊고 지냈던 물건인데, 가느다란 실밥이 붙어 있고 손바닥 모양대로 주름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세제 냄새가 아주 옅게 남아 있었고, 장보는 동안 손에 묻은 파 냄새가 스며든 듯도 했습니다. 한 짝뿐인 장갑을 보니, 현관 불빛이 신발 코끝에 낮게 걸리는 저녁의 기온이 더 또렷해졌습니다.

살다 보면 짝을 잃은 것들이 많습니다. 세탁망 어디엔가 사라진 양말, 뚜껑을 몰라 허전한 유리병, 모서리가 닳아 홀로 남은 퍼즐 조각,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오래된 사진의 미소. 사람 사이에서도 비슷한 틈이 생깁니다. 타이밍을 놓친 인사, 읽고도 답하지 못한 메시지, 하고 싶었지만 접어 두었던 축복의 말. 하루가 저녁으로 스며드는 시간, 그런 빈자리들이 마음의 선반 위로 조용히 올라옵니다.

기도도 때때로 장갑 한 짝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어딘가에 건넸고, 분명히 손의 온기를 담았는데, 대답은 다른 주머니 쪽에 들어 있는 듯 멀게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 사이를 지나며 사람은 쉬 피곤해집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날엔 현관 매트에 떨어진 모래처럼 생각이 흩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한 짝의 자리를 비워 두면, 집은 이상하게도 더 단정해 보입니다. 빈자리가 뭘 기다리는지 알기 때문인 듯합니다.

저녁 공기가 방 안으로 번져 오를 때,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방식은 흘리지 않는 기억처럼 느껴집니다. 완성된 그림만이 아니라, 떨어져 나간 조각의 모양과 자리까지도 기억하시는 분. 그래서 잃어버린 듯한 우리의 말, 길을 잃은 기도, 서랍 속에 잠시 감춰 둔 표정들까지도 그분의 손바닥 안에서는 흩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짝을 찾는 일은 다급한 수색이라기보다 기억을 살리는 일과 닮았습니다. 장갑 한 짝을 현관 선반 위에 올려 두듯, 돌아올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입니다. 오늘 하루에도 그런 자리들이 보였습니다. 구부러진 철제 옷걸이가 모양이 비뚤어도 옷을 버텨 주듯, 누군가 건넨 짧은 미소가 마음을 지탱해 주었습니다. 식탁에 놓인 물 한 잔의 맑은 원, 종이봉투에 남은 따뜻함, 전화기 너머로 전해진 “괜찮아”라는 숨. 겉으로는 소박하지만, 빈자리를 향해 조용히 손 내밀던 온기였습니다.

현관에 세워 둔 장바구니에서 야채 냄새가 천천히 빠져나오고, 문틈 사이로 저녁이 길게 들어옵니다. 한 짝뿐인 장갑도 그 빛을 받아 살짝 말라가는 중입니다. 언젠가 다른 주머니에서 짝을 발견하게 되면, 아마 가볍게 웃음이 날 것 같습니다. 그때 알게 되겠지요. 빠져 있던 자리가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조용히 단단하게 만들어 왔다는 것을. 기다림이 모양을 잃지 않도록, 저마다의 선반 위에서 오늘의 온기가 식지 않도록, 그렇게 하루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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