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 태그에 적힌 안부

📅 2025년 09월 16일 07시 01분 발행

동네 세탁소 문을 밀고 들어가면 약한 증기 냄새와 비눗내가 먼저 반겨 줍니다. 천천히 돌아가는 기계의 웅웅거림 사이로, 주인은 옷걸이를 두어 번 가볍게 튕기고, 얇은 종이 태그를 집게로 찍어 걸어 줍니다. 번호와 날짜, 작은 동그라미 표시. 얼룩이 있던 자리였다는 뜻이지요. 옷을 받아 나올 때 그 종이가 살짝 흔들리며 내는 바스락 소리가, 이상하게도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인사처럼 들릴 때가 있습니다.

집에 와 태그를 조심스레 떼다 보면, 재처리 표시가 연하게 덧그려진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 더 오래 들여다보고, 같은 자리를 다시 씻어 내었다는 흔적입니다. 그 손끝의 인내가, 천의 결 사이사이를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 같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다 옷을 어깨에 걸어 보면, 주름은 대체로 펴졌지만, 세월이 만든 자그마한 기울기와 광택은 남아 있습니다. 완전히 새것이 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나로 돌아온 옷. 그 사이에는 물과 비누, 열과 시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비슷해서,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표가 나는 얼룩이 있습니다. 스스로는 잘 보이지 않는데, 가까이 머무는 이들은 어렴풋이 알아차립니다. 그럴 때 누군가는 서둘러 판단하기보다 천을 펼쳐 결을 따져 보듯, 마음 한켠을 살필 줄 아는 이가 있지요. 신앙이 우리에게 건네는 선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런 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급하게 문장을 마침표로 닫지 않고, 쉼표를 하나 더 두어 주는 여유. 충분히 젖고, 충분히 데워지고, 충분히 식어 갈 시간을 허락하는 것 말입니다.

세탁소의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기다립니다. 창구 앞 의자에 앉아,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다른 이들의 태그가 불려 나가는 걸 묵묵히 듣습니다. 그 사이 마음속에서도 무엇인가 천천히 식어 갑니다. 오늘의 실수, 서운함, 스스로에게 실망한 표정. 금방 사라지진 않지만, 웅웅거림과 함께 가장 날카로운 가장자리들이 둥글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믿음은 어쩌면 기다림을 견디게 해 주는 신뢰의 다른 이름일지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당장 없더라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조용한 확신 말이지요.

태그를 떼어 책상 위에 놓아 두면, 작은 스테이플 구멍이 두 점 찍혀 있습니다. 오후 빛이 스며들 때 그 구멍을 지나온 빛이 종이 위에 아주 작은 원으로 내려앉습니다. 숫자와 점, 빛과 종이. 대단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거기에는 삶의 순서가 고요히 적혀 있습니다. 맡겨 둔다, 기다린다, 다시 건네받는다. 그 사이, 보이지 않는 손들이 우리를 돌본다. 그 사실을 문득 떠올리면, 마음이 한 겹 얇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완벽히 사라지지 않은 흔적이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하루가 있습니다. 그날은 이상하게 옷자락이 가볍고, 어깨의 긴장이 풀립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따라오는 듯합니다. 누군가의 정성으로 펴진 주름처럼, 우리 안의 굳은 마음도 조금은 풀렸을까요. 오늘도 각자의 태그를 달고 출입을 반복하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는 우리의 번호를 기억하고, 같은 자리를 다시 어루만져 줍니다.

옷걸이에 새로 걸린 옷을 옷장에 넣으며, 종이 태그를 책갈피로 바꿔 끼워 봅니다. 다음에 책을 펼칠 때, 그 바스락거림을 듣는 순간이 작은 신호가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 아직 다 닦이지 않은 얼룩이 있을지라도, 지금 이 온기가 이미 시작된 변화라는 것을 알려 주는 신호. 그렇게 우리는 오늘을 다시 입습니다. 낯선 것은 줄고, 익숙한 것은 하나둘 자리로 돌아오고, 마음은 다음 순서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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