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보내는 저녁

📅 2025년 09월 21일 07시 01분 발행

도서관 현관 옆 무인 반납함에는 저녁이면 둔탁하면서도 둥근 소리가 이어집니다. 슬롯을 지나 금속 바구니 위로 책이 내려앉을 때, 바구니에 깔린 두꺼운 펠트가 충격을 삼키고 남겨두는 그 소리. 서가에서 떠나온 문장들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같습니다. 저는 그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품에 안고 있던 책을 가만히 내려봅니다. 대출증 사이로 삐져나온 반납일 스티커가 오늘 날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빌려 있었던 시간의 끝이 온 것이지요.

로비에는 공기청정기의 낮은 숨소리와 복도 조명의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습니다. 금속 손잡이를 잡을 때 전해지는 차가운 촉감, 유리문에 비친 어깨의 기울기, 카드리더기에서 나는 짧은 삑 소리. 이런 사소한 것들이 하루의 질감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서야 알아차리곤 합니다. 바쁘게 넘겨 읽던 문장 사이로 작은 쉼표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느낌입니다.

이런 저녁에는, 하루가 책과 조금 닮아 보입니다. 아침에 펼쳐졌고, 누구를 만나 몇 줄을 더했고, 어느 대목에서는 연필 끝을 가만히 머뭇거리게 했습니다. 장을 덮을 때가 가까워지면 아직 밑줄치지 못한 자리가 남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책등이 약간 휘어 있듯 마음도 그만큼 흔들렸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 흔들림을 탓하기보다, 오늘을 끝까지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학창시절 도서부에서 반납 도장을 찍던 때가 떠오릅니다. 종이 위로 도장이 내려앉을 때, 잉크 냄새와 함께 작은 안도가 퍼졌습니다. 기한을 넘긴 책도, 누군가 기다리던 예약 도서도, 결국 제 자리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제때 오지 못한 것들이 뜻밖에 더 소중해 보이던 순간들이었습니다. 늦음은 실패의 이름만은 아니었지요. 돌아오는 길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표지 안쪽을 뒤적이다 보면 누군가의 얇은 종이가 끼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오래전 버스 영수증, 색이 바랜 메모 한 장, ‘이 대목 좋다’고 조심스레 적은 글씨. 그 사람의 얼굴을 모르면서도, 그 순간의 숨결이 여전히 종이결에 남아 있는 듯합니다. 책은 손에서 손으로 건너가며 사소한 온도를 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하루를 조금씩 빌려 씁니다.

반납함 앞에 서면, 삶에도 비슷한 입구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말로 다 분류되지 않은 느낌들, 설명이 서툰 후회와 작은 기쁨, 잘 접히지 않는 분노의 모서리까지. 무엇은 아직 검토가 덜 되었고, 무엇은 내일 다시 읽어야겠지만, 일단 오늘의 장은 여기까지. 무게를 그대로 인정한 채 누군가에게 맡겨 보는 자리. 이름이 기록되지 않아도 알아보는 손, 순서에 맞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시선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 말입니다.

잠시 후면 사서의 손이 반납함을 열어 책을 하나씩 꺼내겠지요. 먼지를 털고, 표지를 닦고, 분류기에 올려 제 서가로 보내는 그 손놀림을 보노라면, 보이지 않는 배려가 얼마나 많은 질서를 세우는지 새삼 배우게 됩니다. 내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장들도 언젠가 그런 손을 만나 제 자리를 허락받을지 모릅니다. 기도란 어쩌면 그 반납함에 책을 밀어 넣는 동작과 닮아 있는지도요. 다 말하지 못해도, 다 정리하지 못해도, 맡겨진 것들은 이상하리만큼 길을 찾아갑니다.

책을 떨어뜨리는 둔탁한 소리 사이로, 오늘의 마음도 조용히 낮아집니다. 과장도 변명도 없이, 여기까지 온 하루가 나를 지나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기를 바라게 됩니다. 누군가가 내일, 내가 밑줄 친 문장을 만나 작은 위로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나 또한 이름 모를 이가 남겨둔 표시 하나에 걸려 숨을 고르듯 멈춘 적이 있으니까요.

슬롯 앞에서 마지막으로 표지를 쓸어내리며, 오늘 제가 품었던 문장들을 떠올립니다. 잘한 것보다 끝내 붙들고 있었던 것들, 설명 대신 남겨둔 침묵, 이해까지는 닿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듣기. 그 모든 것을 한 번 더 어루만지듯 마음속 서가에 반납합니다. 도장은 보이지 않지만, ‘도착’이라는 표시가 속으로 선명히 찍히는 기분입니다.

도서관 문을 나서 골목을 지나오면, 버스 정류장 전광판의 숫자가 천천히 깜빡입니다. 몇 분 후 도착이라는 안내처럼, 우리의 다음 장도 너무 멀리 있지 않을지 모릅니다. 기다림이 시간을 낭비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조용한 시스템이 묵묵히 알려 줍니다. 책은 다시 누군가의 손으로 떠나고, 저는 빈 품으로 길을 걷습니다. 빈자리가 꼭 결핍은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은 이 소리가 대신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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