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09월 29일 07시 01분 발행
오래된 서랍을 열면 바닥에 얕은 상처가 가로새겨져 있고, 그 위로 자그마한 양철 상자가 조용히 놓여 있습니다. 뚜껑을 밀어 올리는 순간, 금속과 비누가 섞인 옅은 냄새가 올라오지요.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단추들이 부드럽게 부딪히며 소리를 만듭니다. 어떤 것에는 아직 옷감 조각이 매달려 있고, 어떤 것에는 세월을 건너온 흠집이 빛을 먹습니다. 상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단추마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저마다의 옷에 하나씩 역할이 있었지요. 외투의 묵직한 단추, 아이 웃옷의 가벼운 단추, 소매 끝을 붙잡아 주던 작은 단추. 단추가 빠졌다는 사실을 늦게야 알아채던 날들이 떠오릅니다. 그날의 바쁨, 말없이 흘러간 대화, 조금 어수선했던 마음도 함께 생각납니다. 상자 옆에는 토마토 모양의 바늘방울이 묵묵히 놓여 있고, 실타래가 느슨하게 풀려 있습니다. 누군가의 손이 조용히 실을 꿰어 올리던 저녁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살다 보면 빠져버린 것들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꼭 필요할 때 제자리를 잃어버린 마음의 단추, 소식이 끊긴 안부, 끝까지 말하지 못한 고백. 그 빠진 자리로 바람이 스며들어 하루가 허전해질 때가 있지요. 그럴 때 이 작은 상자가 한 가지 생각을 건넵니다. 버리지 않고 모아 둔 것들 덕분에 다시 이어지는 순간들이 있다는 사실을요. 오병이어의 자리에서 남은 조각까지 귀히 모으게 하신 예수님을 떠올립니다(요한복음 6:12). 남아서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을 끝내 품으로 돌려놓으시는 마음이 있습니다.
실을 고를 때 꼭 같은 색을 찾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비슷한 색을 골라 꿰다 보면, 가까이에서 보면 티가 납니다. 버튼홀 가장자리에 새 실이 가느다란 윤곽을 남기지요. 그 흔적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삶도 이렇게 기워진 자리들이 드러나곤 한다는 것을요. 완벽하게 감추지 못해도 괜찮다는 속삭임이 거기에 있습니다. 저마다의 옷자락 어디쯤에, 서툴지만 정성스러운 꿰맴이 있으며, 그 흔적을 알아보는 눈은 대개 다정합니다. 내 옆의 사람도, 나 자신도, 그런 자리를 한두 군데쯤 품고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단추 하나를 달아 올리면 작은 클릭 소리와 함께 옷이 다시 제 모습을 찾습니다. 그 소리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그래서 더 깊이 들립니다. 잠잠한 오후가 그 소리에 맞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습니다. 오늘 붙잡아야 할 마음의 끝도 어쩌면 단추만큼 작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크지 않아도 묵묵히 하루를 지탱해 주는 것, 어느 자리에서든 다시 맞물려 주는 것. 상자를 닫는 소리가 낮게 울리고, 빈칸이 몇 칸 남습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것들을 위해 비워 둔 자리. 그 여백이, 우리를 기억하시는 손바닥만큼 넉넉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