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점의 오후, 마음의 초점

📅 2025년 09월 30일 07시 01분 발행

늦은 오후, 동네 안경점 문을 밀고 들어가면 유리 진열대 너머로 가느다란 드라이버와 작은 나사가 반짝입니다. 프레임들은 가지런히 기대어 서 있고, 렌즈 닦는 천에는 미세한 빛의 가루가 앉습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풍경인데, 제 눈은 오늘따라 사물의 윤곽을 조금 놓치고 있었습니다. 작은 글씨들이 실처럼 엉키고, 사람 얼굴의 표정이 한 겹 멀어져 보일 때, 안경사 선생님의 한 마디가 심호흡처럼 전달됩니다. “자, 이번에는 오른쪽부터 살펴볼게요.”

검사 기계 앞에 턱을 괴고 앉으면 한 장, 또 한 장 렌즈가 앞을 스칩니다. “1번이 더 선명하세요, 2번이 더 편하세요?” 묻는 소리가 참 다정합니다. 어느 쪽이 또렷한지, 어느 쪽이 덜 무거운지, 그 조용한 질문은 삶을 고르는 물음과 닮았습니다. 너무 선명하면 피곤하고, 너무 편하면 흐릿해집니다. 사이사이에서 제 눈은 머뭇거리고, 선생님의 손끝은 미세한 축을 조정합니다. 난시의 각도를 아주 조금 돌리자, 흐려진 활자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마치 마음속에서 헝클어진 단어들이 천천히 의미를 회복하는 순간처럼요.

새 렌즈로 맞춘 안경을 처음 쓰면 바닥이 약간 기울어진 듯 어지럽습니다. 익숙하던 세계가 다른 깊이를 드러낼 때, 발걸음은 자연히 조심스러워집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방의 모서리가 선하고, 멀리 있던 간판도 무리 없이 읽히지요. 새로움에 안 맞아 허둥대던 눈이 시간을 먹고 조금씩 순화되는 동안, 마음도 함께 적응합니다. 익숙한 흐릿함이 주던 안락함을 놓아야 선명함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약간의 어지러움이 지나가야 제 몫의 초점이 잡힌다는 사실을, 천천히 배우게 됩니다.

돌아보면 믿음의 여정도 그와 비슷했습니다. 하나님은 서둘러 고쳐 붙이지 않으시고, 안경사의 손처럼 세심하게 다가오십니다. 얼룩을 탓하기보다 천으로 부드럽게 닦아내고, 도수를 과하게 올리기보다 견딜 수 있는 선에서 조금만 높입니다. 난시의 축을 돌리듯 마음의 방향을 정돈하고, 무게가 코 위에만 아니라 어깨와 등에도 나뉘어 얹히도록 균형을 가르치십니다. 그래서인지 고단한 날에도, 뜻이 막힌 자리에 작은 빛이 스며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 빛은 번쩍이기보다 잔잔해서, 마치 작업대 위에 고요히 앉은 렌즈처럼, 있는 자리에서 천천히 시야를 넓혀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고 말합니다(고전 13:12). 삶이라는 유리 너머에 아직 남은 왜곡과 얼룩을 인정하면, 마음은 오히려 느긋해집니다. 아직 또렷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허용, 그 사이를 채우는 기다림이 우리를 단단하게 합니다. 모든 것을 즉시 분명하게 보려 애쓰는 동안 놓쳤던 온기도, 그렇게 돌아옵니다.

오늘 하루에 무엇이 잘 보이지 않았는지 떠올려 보니, 어쩌면 초점이 틀어진 것은 사물보다 제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둘러 결론을 덧씌우는 대신, 한 번 더 각도를 살펴보아야 했겠지요. 내 주장에 도수를 더한 건 아닌지, 상대의 사연에 빛을 덜어 놓친 건 아닌지. 말 한마디의 경계선이 흐려질 때, 침묵이 렌즈 천이 되어 문장을 닦아 주기도 하더군요.

안경사는 마지막으로 김 서림을 지우고, 새 안경을 조심스레 건넵니다. 그 손길을 바라보며, 오늘의 우리의 시간도 누군가의 손끝을 기다리고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은 빛으로 맞춰진 오후. 그 속에서 서로의 얼굴선을 더 또렷이 알아보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할지 모르겠습니다. 선명함은 때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다른 이름이니까요. 그리고 그 과정은 의외로, 아주 작은 조정에서 시작되곤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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