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공기주입기 앞에서

📅 2025년 10월 02일 07시 02분 발행

해가 기울 무렵, 동네 공원 가장자리에 놓인 작은 공기주입기 앞에서 잠시 멈춰 섰습니다. 낡은 자전거, 아이의 킥보드, 유모차가 조용히 줄을 지었고, 사람들은 말수 없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지요. 주입기에 호스를 연결하면 금속의 입술에서 ‘칙’ 하는 소리가 났고, 손바닥엔 미세한 진동이 스며들었습니다. 게이지의 바늘이 조금씩 올라가며 빨간 선을 향할 때, 누군가 가볍게 미소 지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들어가는데, 그 보이지 않는 것에 의지해 다시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앞사람은 자전거 옆면의 작은 글씨를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권장 압력이 사람마다, 바퀴마다 달랐습니다. 어떤 바퀴는 지나치게 납작해 근육처럼 힘없이 주저앉았고, 어떤 것은 이미 단단해 더 들어갈 여지가 없었습니다. 같은 공기라 해도, 어느 몸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넘치면 오히려 충격에 약해지고, 모자라면 제 길을 고르게 달리지 못하는 것을, 그 작은 바늘 하나가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니, 오늘 제 마음의 바퀴가 얼마나 비어 있었는지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눈에 띄는 낙인은 없는데도 속이 서서히 꺼져가는 날이 있는 법이지요. 소리 없이 기력이 흘러나가는 틈은 보통 사소한 데 있었습니다. 끝내지 못한 전화 한 통, 미뤄 둔 사과, 뉴스의 불안한 문장, 누군가의 짧은 눈짓. 큰 구멍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실금이 오래도록 공기를 빼내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차례대로 공기를 채우는 동안, 저마다의 하루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습니다. 아이의 킥보드는 두 번의 ‘칙’과 한 번의 웃음으로 충분했고, 유모차는 조금 더 시간을 두어야 했습니다. 젊은 직장인의 자전거는 마지막에 바늘이 선을 가리키자 손잡이를 톡 놓았습니다. 그 표정에는 안도의 숨이 고여 있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두어 초의 보탬이면 족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오래 머무는 충전이 필요했습니다. 삶이란 원래 그런 속도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더 빠른가보다, 누구에게 어떤 숨이 알맞은가가 먼저인 듯했습니다.

문득 이런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느니라”(사도행전 17:28). 보이지 않는 공기가 바퀴에 힘을 주듯, 보이지 않는 은혜가 걸음을 지탱해 준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누군가의 안부가 하루를 버티게 하기도 했고, 뜻밖의 용서가 마음의 주름을 펴주기도 했습니다. 기도는 때로 길고 유장한 강물처럼 흐르지 못했지만, 짧은 숨 사이사이에 맺히는 이슬 같은 말로도 충분했던 때가 많았습니다. 그 작은 것들이 다시 길을 나서게 하는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공기주입기 앞에는 오래된 안내판이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사용 후에는 밸브를 가볍게 돌려 남은 압력을 빼주라는 문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마무리가 필요했지요. 마음에도 그런 마무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기쁜 일은 고이 두고, 과한 긴장은 조용히 풀어 놓는 일. 지나친 팽팽함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지나친 느슨함은 방향을 잃게 하니, 우리에겐 길을 버텨낼 만큼의 단단함과 흔들림을 흡수할 만큼의 여백이 함께 필요했습니다.

차례가 다가오자 제 바퀴에도 호스를 연결했습니다. 게이지의 바늘이 옅은 떨림 끝에 제 자리를 찾자, 손바닥에 닿던 진동이 잦아들었습니다. 별것 아닌 대기 속 분자들이 모여 내 무게를 들어 올린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손길이 제 무게를 조금 나누어 들어 주었을지 모릅니다. 그 덕분에 크게 내딛지 않아도, 다음 발걸음이 무사히 이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골목의 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저녁 준비에서 풍겨오는 기름 냄새와, 창가에서 아주 낮게 흘러나오는 오래된 노래.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타이어 속에는 방금 채운 공기가 살짝 뛰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각자의 바퀴가 견딜 만큼의 숨을 지니고, 제 속도대로 자기 길을 갔을 것을 떠올리니 마음에 온기가 남았습니다. 어쩌면 믿음이란, 그 보이지 않는 숨을 신뢰하고 귀 기울이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숨이 어디서 오는지 알기에, 내일의 첫 페달은 다시 가벼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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