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구석에서 듣는 맥의 노래

📅 2025년 10월 07일 07시 01분 발행

해가 엷게 기운 오후, 동네 약국 문을 밀고 들어가니 한쪽 구석에 혈압 측정기가 조용히 놓여 있었습니다. 대기 의자에 앉은 분들이 소매를 걷고 팔을 넣으면, 기계는 잠깐 숨을 고르는 듯 팽팽해졌다가 서서히 공기를 내보냈습니다. 푸르스름한 작은 화면에 숫자가 오르내리고, 얇은 종이에 오늘의 기록이 바늘처럼 찍혀 나왔습니다. 그 소리 사이로 약사의 부드러운 안내말과 비닐봉투가 스치는 소리가 함께 흘렀습니다.

그 장면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몸 안에서는 하루에도 수만 번 심장이 작게 문을 두드린다지요. 이렇게 가까이에, 이렇게 쉼 없이 일해 주는데도 그 노고를 잘 모른 채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두고, 마음이 보내는 신호에도 귀 기울여 본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우리는 요즘 참 많은 것을 셉니다. 오늘 걸음 수, 받은 메시지, 쓴 비용, 체크리스트에 지운 항목의 개수까지. 숫자들은 친절하고 분명해서 마음을 안심시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셀 수 없는 것들이 하루를 더 깊이 지탱할 때가 있더군요. 누군가의 손등을 잠깐 덮어 주던 온기, 밥이 식지 않게 덮개를 씌워 두던 마음, 늦은 귀가를 기다리며 켜 둔 주방등의 노란 빛. 그런 것들은 어떤 눈금에도 잘 걸리지 않지만, 생각해 보면 그 무게가 하루를 다르게 만듭니다.

혈압기가 공기를 뿜는 소리에 마음이 잠시 맞춰졌습니다. 공기 빠지는 그 작은 숨결 사이로, 오래 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 밤늦게까지 깨어 있던 날이면 어머니는 제 손을 잡아 주셨지요. 그 손바닥 너머로 전해 오던 맥의 박자, 마치 방 안의 어둠을 잔잔히 저어 나가던 작은 노래 같았습니다. 그 리듬이 있으면 무서움이 가라앉고, 잠이 조용히 찾아오곤 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7). 때로 이해를 넘어서는 평안이 마음을 지켜 준다는 그 약속이, 오늘 이 약국의 공기처럼 곁에 머물러 있는 듯했습니다. 평강은 큰 북소리로 오지 않고, 몸 안쪽을 따라 흐르는 맥처럼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카운터 옆 작은 화분에서는 국화가 노란 얼굴을 빛내고 있었습니다.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온 바람에 꽃잎이 가볍게 떨렸고, 번호표가 한 장씩 뜯기는 소리가 그 떨림의 장단을 맞췄습니다. 누군가는 처방전을 챙기고, 누군가는 영양제를 묻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얇은 영수증을 접어 지갑에 넣었습니다. 각자의 사연이 유리문을 드나드는 동안, 이 작은 공간은 묵묵히 사람들의 하루를 이어 주고 있었습니다.

어젯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잠들기 전, 사소한 걱정들이 어깨에 오래 붙어 있는 듯해 잠시 가슴에 손을 얹었습니다. 손바닥 아래에서 들려오던 작고 일정한 북소리, 그 소리에 생각들이 차례를 양보했습니다. 오늘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박자, 이해를 앞세우지 않고 먼저 건네지는 안부 같은 박자. 그 사이로 미처 감사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하나둘 떠올랐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건넨 인사, 고단한 표정을 읽어 준 눈빛, 길을 내어 준 운전자의 손짓 같은 것들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살리는 일들이 많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누군가의 배려, 누구도 듣지 못한 짧은 기도, 한다리 건너 전해지는 위로의 말. 그 모든 것들이 오늘의 심장을 지키는 또 다른 손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숫자는 우리를 도와주지만, 마음의 파동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날은 높은 수치 속에서도 평안이 숨 쉬고, 또 어떤 날은 정상의 숫자 속에서도 텅 빈 소리가 들릴 때가 있습니다.

천천히 약국을 나섰습니다. 종이에 찍힌 오늘의 수치를 네모 반듯하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다른 기록을 하나 더 넣었습니다. 기다려 준 얼굴들, 스쳐 지나간 친절들, 말없이 곁을 지켜 준 시간의 향기. 그 기록에는 숫자가 없지만, 발걸음의 무게를 다르게 만드는 힘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문턱을 넘는 순간, 어깨에 얹혀 있던 무엇이 조금 가벼워지고, 가슴 안쪽의 북소리가 한층 고르게 들렸습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맥이 있습니다. 재촉하며 뛰던 날도, 이유 없이 느리던 날도 있었습니다. 다만 오늘의 박자가 어제와 다르다고 해서 마음이 흔들릴 필요는 없겠지요. 깊은 곳에서 우리를 지키는 평강이, 말없는 방식으로, 제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 하나로도 하루의 나머지가 조금 더 고요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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