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0월 15일 07시 01분 발행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조용해진 부엌에 주전자 소리가 낮게 이어집니다. 뚜껑이 조금 흔들릴 때쯤, 유자 하나를 꺼내 칼등으로 껍질을 얇게 벗겼습니다. 노란 띠가 조용히 돌아 나가고, 컵에 뜨거운 물을 붓자 향이 먼저 올라옵니다. 김이 컵 벽에 묻어 작은 방울을 만들고, 유자의 얇은 껍질이 물 위에 둥근 섬처럼 떠 있습니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이 향은 어쩐지 집 안에 잔잔한 축복을 들여놓는 기분이 듭니다.
맑은 물은 아무 맛이 없는 줄 알았는데, 얇은 조각 하나가 닿는 순간 빛깔과 마음이 달라집니다. 오늘 하루도 그랬습니다. 별일 없이 흘러간 시간 같다가도, 누군가 건넨 짧은 안부, 문고리에서 느껴진 미세한 온기, 저녁 냄비의 소리 같은 것들이 하루의 결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평범의 한가운데에 작은 유자 조각들이 숨어 있었던 셈이지요.
어릴 적 겨울, 어머니는 하얀 법랑 냄비에 유자를 넣고 오래 우려내곤 하셨습니다. 껍질 안쪽의 하얀 부분을 굳이 전부 떼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 쌉싸래함이 있어야 단맛이 오래 간다며 웃으시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단맛을 지켜주는 미량의 씁쓸함.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습니다. 우리도 각자의 하루에 그런 미량의 맛을 품고 살아온 듯합니다. 뜻대로 되지 않았던 대화의 끝, 관절이 알려준 둔한 통증, 되돌아보면 덕이 된 서투름 하나. 그 모난 조각들이 달큰함만으로는 지켜지지 않는 무게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전도서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때에 맞게 아름답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끓는 물에 금세 사라질 것 같던 향이, 온도가 조금 가라앉자 오히려 깊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너무 서두르면 향이 연하고, 오래 태우면 쓰기만 해집니다. 불의 세기를 맞추는 일처럼, 마음에도 적당한 때가 있음을 새삼 알게 됩니다. 조급함이 한 모금 식어가는 동안, 오늘의 쓸쓸함도 함께 누그러지는 듯합니다.
머릿속을 맴돌던 이름 하나가 있었습니다. 연락을 미루다 시간이 늘어졌고, 말문은 더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유자 향이 부엌 문턱을 넘어 방으로 흐를 때, 그 이름 쪽으로 향이 따라가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은 마음 가장자리에 따뜻함이 번지는 느낌. 말이 없어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말을 찾느라 조용했을 뿐이라는 변명도 조금 풀립니다. 때를 기다리는 마음과 기다림을 견디게 하는 향이, 같은 컵 안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밤입니다.
컵 바닥에 반달 모양 껍질이 남아 있습니다. 물은 식었는데도 노란빛은 쉽게 바래지지 않습니다. 기도 같지도, 다짐 같지도 않은 작은 빛이 그대로 자리합니다. 손바닥에 아직 열기가 묻어 있고, 부엌등 아래로 그림자가 길어집니다. 오늘의 말들과 침묵이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고, 이렇게 향 하나로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는 풍경. 잠시 머물다 다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이 정도의 따뜻함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향이 서서히 옮겨 붙은 공기만 남기고, 밤이 조용히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