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시장과 저울의 영점

📅 2025년 10월 17일 07시 01분 발행

해가 시장 지붕 너머로 천천히 미끄러지던 저녁이었습니다. 채소가게 앞 전자저울에 초록빛 숫자가 잠깐 깜박이더니, 상인이 빈 그릇을 올려놓고 ‘영점’ 버튼을 가볍게 눌렀습니다. 0.00. 그릇의 무게가 사라지고, 그때부터 담기는 것만 정확히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단순한 동작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오늘 하루도 저마다의 그릇을 들고 다니셨을 테지요. 역할의 그릇, 기대의 그릇, 걱정의 그릇. 아무것도 올리지 않았는데 이미 무게가 실려 있는 느낌, 그런 날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피로가 먼저 자리를 잡고, 말 한마디에도 어깨가 내려앉는 저녁. 그 무게가 사라지지 않은 채 무언가를 더 얹으면, 모든 것이 부당하게 무거워집니다. 저는 그 전자저울 앞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재실 때도 먼저 그릇의 무게를 빼 주시는 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시선과 비교, 오래된 상처의 습관적인 방어, 스스로를 과하게 탓하는 마음. 그런 것들이 그릇이 되어 매 순간을 기울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저울에는 ‘영점’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 이름을 불러 주시는 그 목소리가 우리 안에서 처음의 기준을 다시 맞춥니다. 받아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 실제로 있는 것과 덧씌워진 것의 경계가 분명해집니다. 용서가 영점이 되고, 쉼이 영점이 되고, 사랑이 영점이 됩니다. 오늘을 돌아보면, 뜻하지 않게 흘러나간 말도 있었고, 오해를 풀지 못한 침묵도 있었지요.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그릇을 들어주듯 카트를 밀어주던 순간, 뜨거운 국물을 조금 더 덜어 건네던 작은 친절, 횡단보도 신호 하나를 기다려 준 그 짧은 인내도 있었습니다. 누가 모르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 무게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분의 저울에 올려보면, 보잘것없어 보이던 마음 한 줌도 묵직한 의미로 기재됩니다. 타인의 눈금은 언제나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비교는, 남의 그릇을 얹은 채로 나를 재는 일과 닮았습니다. 저녁 공기가 내려앉는 시간, 시장 끝자락에서 상인들이 빈 바구니를 씻어 물기를 털고, 비닐 덮개를 조심스레 내립니다. 초록색 ‘0.00’이 홀로 남아 반짝이는 광경을 바라보며, 제 마음 안에서도 작은 불빛 하나가 켜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든 문제가 곧장 풀린 것은 아니고, 씻겨 내려간 슬픔도 아직은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이한 가벼움이 스며듭니다. 기준이 다시 맞춰졌다는 실감 때문이겠지요. 내일도 분명 새로운 무게들이 얹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사랑의 손이 영점을 눌러 주신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오늘의 숫자를 덜 요란하게 만들고, 그대로의 무게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무겁지 않게, 필요 이하로 가볍지 않게. 저녁이 깊어질수록 초록빛 숫자는 더 또렷해지고, 마음도 천천히 같은 색으로 고요해집니다. 누구에게도 크게 들리지 않지만, 우리 안에서 분명히 들리는 소리. 이제 괜찮다고, 있는 그대로를 기록해도 된다고, 그런 뜻을 전하는 미세한 클릭. 그 작은 소리가 오늘의 끝을 단정히 정리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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