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반납함

📅 2025년 11월 01일 07시 02분 발행

동네 도서관 벽면에 붙은 금속 반납함은 해가 지면 더 또렷해집니다. 가로등 불빛이 사각 입구를 얕게 비추고, 책 한 권이 들어갈 때마다 짧은 철 소리가 납니다. 금속문이 기울며 내는 숨소리, 표지의 모서리가 닿을 때의 둔탁한 울림. 그 사이로 한 사람의 하루가 지나갑니다. 누군가는 손등을 잠깐 망설이며 책등을 쓸고, 누군가는 무심히 밀어 넣고 턴을 돌죠. 다만 그 잠깐의 정적 속에, 각자의 오늘이 조용히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반납함으로 들어가는 책들은 작은 사연을 한 장씩 붙잡고 있습니다. 영수증이 책갈피가 되어 끼어 있고, 페이지 끝에 접힌 흔적이 마치 모퉁이에 걸린 마음 같기도 합니다. 누군가 밑줄을 그은 연필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 있어, 그 문장을 붙들고 버텼던 밤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듯합니다. 어느 책에서는 은행잎이 말려 나옵니다. 계절이 바뀌어도 그 잎은 그 페이지에 남았고, 이제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갑니다. 반납은 “미안합니다”와 “고마웠습니다”가 동시에 섞인 동작 같습니다. 다 읽지 못한 부끄러움과, 여기까지 함께해 준 감사가 한 몸으로 내려갑니다. 통 안쪽 어둠에서 책들이 서로 닿으며 제자리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도 마음속 숫자를 천천히 0으로 되돌리는 것 같아집니다.

불이 꺼진 도서관 안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흐릅니다. 새벽이면 사서들이 조용히 반납함을 비우고, 제본이 느슨해진 곳을 살피고, 빌려간 흔적을 가볍게 털어 내어 다시 선반으로 돌려놓겠지요. 그 일을 상상하면, 우리 안에도 그런 반납함이 하나 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낮 동안 뒤엉킨 말과 초조, 빛나지 않은 수고와 뜻밖의 기쁨을 밤의 입구로 천천히 밀어 넣으면, 보이지 않는 손길이 어둠 속에서 그것들을 분류하고 다듬어 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23:1).” 누군가가 우리 삶의 신간과 구간을 함께 돌보시고, 손때 묻은 표지를 부끄러움 대신 이야기로 받아 주신다는 사실이, 이 밤을 덜 쓸쓸하게 합니다.

사람마다 반납하기 어려운 장면이 있습니다. 미루다 잠든 안부, 돌아오지 않은 대답, 아직 말끝을 닫지 못한 기도. 그 남은 문장들 사이에 여백이 생기면, 하나님은 그 사이를 지켜 주신다는 확신이 마음을 반듯하게 세워 줍니다. 반납함 옆 유리문에 비친 얼굴을 스치듯 바라보면, 오늘의 표정과 내일의 표정이 겹쳐 보입니다. 유리 표면에 흐려진 숨이 금세 사라지듯, 방금 전까지 뜨겁던 마음도 차분해집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손이 가볍습니다. 가방 속에서 사라진 책의 무게만큼, 설명하지 못했던 감정도 조금 비워진 느낌입니다. 현관 불을 켜고, 주방에서 주전자 물이 잔잔히 끓습니다. 방금 반납함에 넣은 책처럼, 오늘의 문장도 덮였다는 안도감이 퍼집니다. 표시도, 영수증도, 덜 읽은 변명도 없이 그저 맡겨 놓은 밤. 때로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이, 가장 정직한 고백이 되는 순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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