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봉투 하나의 시간

📅 2025년 11월 06일 07시 01분 발행

오래 닫혀 있던 서랍을 정리하다가 사진관 봉투 하나를 발견하실 때가 있지요. 종이 표면이 손끝에 거칠게 닿고, 구석에 작은 연필 글씨로 날짜가 남아 있는 봉투입니다. 봉투를 열면 네 귀퉁이가 하얀 테로 둘러진 사진들이 차례로 나오고, 몇 장은 빛이 과하게 번져 얼굴이 희미합니다. 어떤 장면은 누군가 눈을 감아 버렸고, 또 다른 장면은 촛점이 비껴 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 어설픔이, 그날의 공기와 숨소리를 고스란히 껴안고 있는 듯 보입니다. 잘 찍힌 한 장이 누군가의 인생을 설명하지 못하듯, 흐릿한 장면 안에도 우리의 진짜 표정이 숨어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 시절에는 기다림이 사진의 일부였습니다. 필름을 맡기고 며칠 뒤 다시 찾아오던 길, 들고 가는 봉투 속에서 아직 보지 못한 장면들이 종이로 옮겨져 있을 거라는 기대가 가벼운 떨림으로 남았지요. 그 사이의 시간은 비워 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이 자라던 때였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화면에서 즉시 결과를 확인하고, 좋지 않으면 지워 버릴 수 있습니다. 지우는 일이 간편해질수록, 마음은 조금 더 덜 기다리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삶에는 곧바로 드러나지 않는 장면들이 있고,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윤곽이 살아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어둠 속 현상액이 천천히 흔들리며 이미지를 길어 올리듯, 우리 하루에도 조용히 진해지는 색이 있습니다.

성경은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사 49:16)고 말합니다. 급히 찍었다가 지워지는 스냅샷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자리라는 뜻처럼 들립니다. 어떤 날은 제대로 웃지 못하고, 어떤 날은 한 줄 메모만 남긴 듯 빈약하게 지나가도, 그분의 손바닥에서는 누락되지 않는 장면으로 남아 있겠지요. 사진관 봉투 속 한 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은 별것 아닌 배경이 더 오래 마음을 잡아끌 때가 있습니다. 삐뚤게 채워진 단추, 빨랫줄 사이로 들어오던 오후의 기운, 벽에 매달린 오래된 달력. 그때의 나는 힘겨웠는데, 사진 속 공기에는 묘한 온기가 있습니다. 그 온기는, 그 순간에도 나를 둘러싼 조용한 자비가 있었다는 증거처럼 보입니다.

하루의 수고를 접고 밤을 맞을 때, 오늘 찍힌 마음의 네거티브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잘 나온 장면도 있고, 마음에 걸리는 장면도 있지요. 정리되지 않은 표정과 미완의 말들이 섞여 있을 때, 굳이 서둘러 판정을 내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직 현상이 덜 끝났다고 여겨도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손에서 천천히 흔들리며 색을 찾아가는 중이라면, 지금의 어둠도 과정의 일부일 테니까요. 때가 되면, 뜻밖의 구석에서 부드러운 빛이 살아나 얼굴을 밝혀 줄지 모릅니다.

오늘 발견한 낡은 사진 봉투를 다시 닫으면서, 손가락 끝에 종이의 감촉이 오래 남습니다. 닫힌 봉투 안에는 과거의 장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을 바라보는 지금의 마음까지 살며시 들어가 앉습니다. 내일 다시 열었을 때, 여백 많은 하얀 테와 함께 조금 더 너그러운 시선이 따라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느리게 살아지는 날들이 우리 삶의 앨범을 채우고 있습니다. 여전히 흔들리는 컷이 있다 해도, 그 속에 담긴 숨결이 오래 빛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해 보이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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