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실의 조용한 약속

📅 2025년 11월 10일 07시 02분 발행

동네 골목 끝에 작은 사진관이 있습니다. 유리문에는 오래된 가격표가 약간 기울어 붙어 있고, 안쪽에서는 스탠드형 빨간 불빛이 어둠을 젖은 벽처럼 붙들고 있습니다. 액자 유리를 갈아 끼우러 들렀다가, 주인 어르신의 허락을 얻어 잠깐 암실 곁에 서게 되었습니다.

트레이가 세 개 놓여 있었습니다. 얕은 물 그릇 같지만, 그 안에서 시간이 일을 하는 자리라고 주인께서 웃으며 말하셨습니다. 타이머가 똑딱거리며 초를 헤아리고, 고무장갑 낀 손이 집게를 쥔 채 종이를 조심스레 흔듭니다. 처음에는 하얀 종이뿐인데, 어느 순간 물 밑에서 희미한 윤곽이 솟아오릅니다. 빛과 어둠이 서로의 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그 찰나, 마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주인은 종이를 들어 살짝 보여 주었습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여도, 이미 다 들어 있어요. 필요한 건 물과 기다림뿐이지요.” 그 말이 어쩐지 우리 나날과 닮아 보였습니다. 겉으로는 진척 없는 하루 같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무언가가 익어 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사진의 네거티브는 밝고 어두움이 뒤바뀐 채로 시작합니다. 거꾸로 보이는 세계가 낯설게 느껴지지만, 정해진 순서의 물과 시간이 지나면 제 얼굴을 되찾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요. 때로는 무의미와 실패가 앞면처럼 느껴지고, 기쁨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건너야 할 물이 있고 지나야 할 시간이 있기에 아직 결론이라 부르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현상액의 냄새는 묘하게 씁쓸하면서도 안정감이 있습니다. 물결이 잔잔히 흔들릴 때 비로소 선이 또렷해지고, 멈춰 있을 때는 되레 얼룩이 남는다고 주인은 덧붙였습니다. 흔들림이 파괴가 아니라 완성의 과정일 때가 있습니다. 마음의 장면도 그럴지요. 조금 흔들리고, 조금 지워졌다가, 다시 드러나면서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트레이에서 정지액으로, 다시 정착액으로 옮겨가는 동안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말 대신 물이 움직이는 소리, 타이머 소리, 고무장갑이 스치는 소리가 작은 예배처럼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찍은 가족사진 한 장이 떠올랐습니다. 웃음과 주름, 옷의 구김과 배경의 어색함까지, 그때는 흠으로 보였던 것들이 지금은 기념이 됩니다. 삶이 흘러간 시간 속에서 의미를 바꾸어 건져 올리는 방식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전도서 3:11). 암실의 물 위로 차오르는 얼굴을 바라보며, 그 말씀이 조용히 가슴에 놓였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어느 날 갑자기 외부에서 덧칠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 이미 심겨진 것을 때가 이르게 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급할수록 사진을 물 속에 오래 담가야 한다고 주인이 말할 때, 서두름의 무게가 조금 내려앉았습니다. 바짝 말린 결론을 재촉하던 제 성급함이, 미처 씻기지 않은 화학약품처럼 남아서 번지지 않았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직 흐릿한 자리에도 의미가 있어, 그 흐림이 없으면 깊이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실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진을 꺼내 집게에 걸자, 물방울이 가장자리에 맺혔습니다. 바람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 공간인데도, 사진은 아주 조금씩 흔들렸습니다. 붙잡고 있는 것은 무게가 아니라 걸려 있다는 사실, 누군가의 손길이 지나간 흔적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요. 문득, 우리도 그렇게 붙들려 있는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버티는 힘이 다할 때에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걸려 흔들리면서 말라가는 시간. 그 시간이 사진을 망치지 않듯, 우리도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암실을 나서며 바깥의 햇살이 눈부셨습니다. 금방 완성된 사진을 손에 쥐고 골목을 걸을 때, 마음 한켠이 묘하게 밝으면서도 고요했습니다. 물과 기다림, 그리고 때. 단순하지만 잊기 쉬운 세 단어가 오늘의 호주머니 속에서 서로 기대고 있었습니다. 아직 밝아지지 않은 일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의미들이 어둠의 품 안에서 조용히 제 얼굴을 찾아가고 있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하루의 장면들도 조금 더 다정하게 보였습니다.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한 장의 사진처럼, 우리도 각자의 암실에서 천천히 빛을 얻고 있을 것입니다. 집게에 매달린 채 미세하게 흔들리는 종이의 숨결이 한동안 귀에 남았습니다. 언젠가 완전히 마르면, 그때 보여 줄 얼굴이 이미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숨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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