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1월 25일 07시 02분 발행
밤이 깊어집니다. 서랍을 천천히 열어 오래된 양철 상자를 꺼내 들었습니다. 뚜껑이 스며드는 소리를 내며 열릴 때, 단추들이 서로 부딪히는 부드러운 소리가 방 안에 톡톡 흩어졌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셔츠나 외투에서 남은 단추를 이 상자에 모으셨지요. 저는 그 둥근 것들을 뒤적이며, 별을 한 움큼 잡아 보는 기분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목단 나무결이 살아 있는 카디건의 단추 하나가 빠져버려, 상자를 열었습니다.
여러 모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유리처럼 맑은 것, 누렇게 시간이 스민 것, 바다빛을 닮은 작은 것, 그리고 이름을 잃어버린 것들까지. 저는 색과 무늬를 비교해 보다가, 완벽히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용해졌습니다. 결국 가장 가까운 하나를 손에 올리고, 바늘귀에 실을 꿰었습니다. 바늘 끝이 램프 빛에 잠깐 반짝이더니, 손끝으로 전해지는 서늘함이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살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단추 하나쯤은 빠집니다. 말이 허투루 풀어지거나, 약속의 매듭이 느슨해지거나, 마음의 앞섶에 빈 자리가 뻥 뚫리는 때가 있지요. 그때 우리는 옷깃을 한 손으로 꼭 잡은 채 걸음을 옮기곤 합니다. 드러나지 않게, 스스로를 간수해 보려 애쓰면서요.
그 손에 바늘과 실이 쥐어질 때가 있습니다. 인내와 기다림, 그리고 남몰래 드리는 기도 같은 것들이 실타래를 이룹니다. 골무를 손가락에 끼우면, 작은 쇳소리 하나에도 어쩐지 보호받는 기분이 듭니다. 바늘은 작고 얇지만 길을 잃지 않습니다. 천 사이를 오가며, 내쉬는 숨과 함께 지나갑니다. 보이는 면에는 단추가 자리하고, 보이지 않는 뒤쪽에는 작은 매듭이 생깁니다. 누구도 보지 못하는 그 매듭에 우리의 믿음이 살포시 앉습니다. 주님은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눅 12:7)라고 말씀하셨지요. 단추 하나의 자리를 기억하시는 분이, 우리의 빈 자리 또한 잊지 않으신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오늘 고른 단추는 원래 것과 조금 달랐습니다. 빛깔도, 무늬도 약간 어긋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카디건은 다시 카디건이 되었습니다. 같은 옷이면서도 이전과는 다른 옷이 되었습니다. 빠짐과 되돌아옴을 지나온 뒤의 결이, 손바닥에서 조용히 느껴졌습니다. 울퉁불퉁했던 오후가 묘하게 단단해지는 순간, 아무도 모르는 뒤편의 작은 매듭이 옷을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상자 안에는 여전히 짝을 찾지 못한 단추들이 남아 있습니다. 평생 자신의 옷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둥근 형태만으로도 위로를 주는 것이 있습니다. 가끔은 손바닥에 올려 굴려 보며, 우리가 스쳐 지나온 얼굴들을 떠올립니다. 이름을 잊었으나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는 사람들, 한마디로 건네지 못한 인사, 끝까지 맺지 못한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이 한 상자 안에서 서로의 소리를 들어 주는 듯합니다. 기다림이 헛되지 않다는 믿음이 상자 속에서 작은 숨을 쉽니다.
바늘이 마지막 구멍을 통과하자, 실이 조금 뜨거워졌습니다. 뒤편에서 조심스레 매듭을 지었습니다. 매듭 하나가 “오늘”을 정리해 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못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매듭 때문에 단추는 제자리를 지킵니다. 내일 아침, 손끝이 단추를 찾을 때, 괜한 더듬거림이 줄어들겠지요. 그 평범한 든든함이 하루를 열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철 상자를 덮고 나니 방 안이 더 고요해졌습니다. 금속과 오래된 비누의 냄새가 가늘게 감돌았습니다. 램프 빛이 상자 뚜껑을 타고 손등으로 번져 내려왔습니다. 오늘의 사이사이를 지나온 실처럼, 마음도 천천히 한 방향으로 모아졌습니다. 소리 없이 묶인 작은 매듭 하나가, 우리를 지탱하는 은총처럼 느껴졌습니다. 가끔은 이런 여분이 주머니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놓입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허전한 앞섶에, 조용히 손을 내밀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때문입니다.
세상은 종종 거대한 것들로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밤의 끝자락에는 늘 이런 작고 둥근 것들이 있습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얻게 되는 자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버티는 매듭, 그리고 그 사이를 건너는 우리의 숨. 오늘 단추 하나를 달며, 하나님께서도 보이지 않는 뒤편에서 우리의 하루를 꿰매고 계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소한 소리들이 서로를 불러 주는 밤, 상자 안의 작은 별들이 조용히 반짝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