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점의 작은 화분

📅 2025년 11월 26일 07시 01분 발행

도심 끝자락, 버스가 모여 쉬는 종점에서는 소리가 낮아집니다. 막 멈춘 엔진이 서서히 식어 가는 소리, 비어 버린 좌석에서 천천히 빠져나오는 온기, 전광판 숫자가 목적지를 바꾸며 짧게 깜박이는 빛. 그 사이로 기사님 한 분이 운전석 옆에 놓인 작은 화분을 들고 내리십니다. 투명한 물병에서 떨어지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흙 위에 부드러운 동심원을 그립니다. 한낮인데도 햇빛은 얌전히 눕고, 물 닿은 흙에서는 초록의 냄새가 아주 조금 올라옵니다.

버스가 도착하고 다시 떠나는 사이, 이 작은 화분은 늘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듯합니다. 누구의 선물이었는지, 언제부터 함께 달려왔는지 알 수 없지만, 매 회차마다 한 모금의 물을 얻고 다시 흔들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길을 반복하는 큰 차의 삶에, 이 소박한 식물이 묵묵히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위로가 됩니다. 무겁고 거친 바퀴 아래에서도, 누군가는 반드시 작고 연한 것을 잊지 않는다는 사실이요.

버스가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오는 동안, 도시의 얼굴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신호등, 같은 골목 간판, 같은 시간표가 앞으로도 계속 일상을 안내하겠지요. 그런데 종점에 닿으면 언제나 아주 조용한 틈이 생깁니다. 목적지가 바뀌는 그 찰나, 기사님의 어깨가 툭 하고 내려앉는 그 순간, 화분이 물을 마시는 동안 실내의 공기가 새로워지는 느낌. 반복의 하루 속에서도, 마음은 그 틈에서 다시 숨을 고릅니다. 회차가 없으면 바퀴는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의 하루도 어쩌면 그렇습니다. 멈춘다기보다, 돌아 나와 다시 이어 가는 작은 원.

오늘 도로 위를 달리고 돌아온 마음에도, 말라 있는 자리 하나쯤은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늘 같은 풍경 사이에 있었지만, 막상 손을 대지 못했던 자리. 글자로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와, 설명할 필요 없는 슬픔이 눌려 있던 자리. 종점의 화분이 물을 받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자리도 물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용히 들립니다. 누구의 위로가 아닐지라도, 물처럼 스며드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

“주의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로우니”(애가 3:23)라는 문장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새벽의 거룩한 울림만을 뜻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버스가 전광판을 돌리는 낮의 회차에도, 인자는 새롭습니다. 어제의 먼지를 떨구고 오늘의 길로 들어서기 직전, 흙이 물을 받아들이는 그 몇 초.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듯 보이지만, 그 짧은 시간에 다음 구간을 건너갈 힘이 생깁니다.

기사님이 화분의 밑동을 한 번 쓰다듬고 운전석으로 올라가십니다. 전광판이 새 목적지를 밝히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공기가 다져집니다. 다시 시작이지만, 같은 시작은 아닙니다. 방금 전 물이 떨어진 자리처럼, 마음 한 켠도 조금 더 부드러워졌을 테지요. 누가 보태 준 것도, 크게 다짐한 것도 아닌데, 아주 작은 친절 하나가 하루의 방향을 바꾸는 때가 있습니다. 회차에 들었던 물소리처럼, 들은 이만 알고 지나가는 변주입니다.

저마다의 가방에는 바쁘게 챙겨 넣은 일들로 가득하지만, 그 틈새마다 작은 화분 하나쯤 들어 있습니다. 이름 붙이지 못한 소망, 쉽게 부러지는 용기, 아직 자라지 못한 기도 같은 것들. 종점의 물줄기를 떠올리면, 그 화분도 언젠가 충분히 젖을 것 같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분명히. 버스가 다시 길로 나서는 것처럼, 우리의 하루도 그렇게 조심스럽게 이어집니다. 말없이 적셔진 마음의 흙에서 아주 작은 초록이 올라오기를, 오늘이라는 노선의 어딘가에서 천천히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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