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한켠의 종이 한 장

📅 2025년 11월 28일 07시 01분 발행

세탁소에서 막 찾아온 낡은 겨울 코트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고운 김이 올라와 정돈된 옷깃을 손끝으로 쓰다듬다 보니, 문득 주머니 속이 궁금해져 손을 넣어보게 되었지요. 구겨진 영수증 한 장과 떨어진 단추 하나가 손바닥 위에 올라왔습니다. 잉크는 희미해져 숫자들이 물가의 자갈처럼 둥글게 흐려졌고, 단추는 오래 묵은 구슬처럼 조용히 반짝였습니다. 그 작은 것들을 바라보며 지난겨울의 제 표정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비가 오던 날, 역앞에서 급히 계산하던 모습, 서둘러 주머니에 밀어넣고 잊어버린 마음, 그때의 어깨 무게까지 따라 올라오는 듯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이런 주머니가 있지요. 그날의 표정, 스쳐간 말, 다 하지 못한 대답, 기대와 실망의 동전 몇 닢 같은 것들이 모릅니다 사이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합니다. 계절이 바뀌어도, 삶의 속도가 달라져도, 주머니 깊숙이 든 것은 그대로 남아 있곤 합니다. 별것 아니라고 여겼지만, 문득 손을 넣으면 무게가 전해지는 그 느낌. 저도 오늘 그 감촉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영수증을 펼쳐보니 커피 두 잔과 늦은 시간의 간단한 식사가 적혀 있었습니다. 누군가와 나누었던 짧은 저녁이 떠올랐습니다. 다정했던 몇 마디, 서먹했던 숨, 결말 없이 흩어진 이야기의 꼬리. 시간이 지나면 잉크가 흐려지듯 기억도 모서리가 둥글어져서, 그때의 정확한 문장은 사라졌지만, 마음에 남은 온도는 이상하게 더 또렷해지곤 하더군요. 단추를 손끝에서 굴리며 생각했습니다. 옷을 고정해 주던 작은 둥근 것이 떨어져 나간 채로 한 겨울을 지냈구나. 그 사이 저는 어떻게 모양을 잡고 있었을까. 매무새가 틀어졌던 날들이 있었을 텐데,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냥 지나왔겠지요.

제 마음속 주머니도 조용히 뒤집어 보았습니다. 말로 하지 못해 접어 넣었던 염려 하나, ‘괜찮다’며 아무렇지 않은 척 덮어 두었던 서운함 하나, 닳아 해진 소망의 귀퉁이. 꺼내 놓으니 방 안의 빛이 사물에 고르게 앉았습니다. 그제야 무게가 모양을 드러냈습니다. 참 신기하지요. 손이 닿기 전까지는 분명히 없다고 믿었던 것들인데, 꺼내놓고 보니 분명한 이름과 색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문득 오래 전 마음속에 새겨둔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맡긴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들렸습니다. 거창한 결단이라기보다, 주머니를 뒤집어 햇볕에 말리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손에 쥔 것을 하나씩 내려놓고, 잉크가 번진 영수증처럼 알아보기 어려운 마음의 이유들을 있는 그대로 펼쳐놓는 일. 해결을 증명하는 서류가 아니라, 오늘의 마음이 여기 있다고 보여드리는 행위 말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종이들을 늘어놓고 있으니, 코트에서 풍기는 세제 냄새와 함께 이상하게도 가벼운 공기가 방 안을 돌았습니다.

세탁소에서 돌아오는 길, 골목 수선집 앞에 오래된 재봉틀이 놓여 있었습니다. 은색 바늘이 천을 뚫고 올라오고 내려가는 그 단순한 움직임이 묵묵히 시간을 기워놓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헤진 소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저는 제가 흘려보낸 말과 눈길도 언젠가는 이렇게 이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아도, 실밥 하나가 또 하나를 데려와 단단해지는 것처럼요.

버스 정류장을 스치는 바람 속에서, 기다림의 표정들이 각자 자기 주머니를 가만히 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작은 비밀, 아직 말하지 못한 사과, 저만 알던 두려움. 아마 저마다의 영수증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숫자가 흐려져도 남는 건 행간의 온기, 그날의 숨결, 그때의 시선.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주머니를 한번 더 만져보게 되었습니다. 손끝에 종이의 모서리가 느껴지지 않자, 마음속 어딘가가 조금 넓어졌습니다. 비워진 자리에 바람이 지나가고, 그 바람이 코트를 부드럽게 들어 올렸습니다.

저녁이 가까워진 시간, 옷걸이에 코트를 걸어 두며 어깨선과 옷깃 사이의 조용한 간격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 사이에도 이런 간격이 있겠지요. 너무 좁지도 넓지도 않게, 숨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의 여백. 그 여백 안에 맡겨진 것들이 천천히 말라가고, 이름을 잃은 걱정들이 조금씩 빛을 잃는 동안, 마음도 제 모양을 찾아갑니다.

오늘 저는 주머니 속 작은 종이 한 장에서 한 계절을 꺼내 보았습니다. 되돌아보니, 남겨둘 것과 맡길 것이 어렴풋이 구분되었습니다. 가벼워진 옷깃이 바람을 따라 조심스레 흔들릴 때, 발걸음도 덩달아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지지 않은 저녁이었지만, 그 가벼움이 이미 길의 모양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늬를 따라 한동안 천천히 걸어보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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