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2월 17일 07시 02분 발행
동네 우체국은 오후가 깊어질수록 묘한 고요를 품습니다. 대기표 종이가 손끝에서 가볍게 찢겨 나가고, 전광판의 숫자가 한 칸씩 넘어갈 때마다 누군가의 사연이 작은 상자에 담겨 창구를 지나갑니다. 오늘 제 앞에 선 분은 신문지로 단단히 싸인 소포를 꺼내 저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봉투 모서리에서 사과 향이 아주 희미하게 났고, 저울 눈금은 한동안 미세하게 떨리다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몇 그램의 차이로 요금이 달라진다는 직원의 말을 들으며, 저울판에 담긴 것이 사과 두 알뿐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용히 올라왔습니다.
우리의 하루도 그렇습니다. 같은 시간이 흘러도 어느 날은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고, 또 어떤 날은 아무 일 없어도 가슴이 가벼운 때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차가운 말 한마디가 오랫동안 어깨를 누를 수 있고, 조용히 건네진 미소 하나가 남은 하루를 밝히기도 하니까요. 숫자와 표로는 다 담기지 않는 무게가 분명 존재합니다.
창구 너머에서 등기 스티커를 붙이던 직원이 종이테이프를 길게 뜯어 상자에 감았습니다. 테이프가 지나간 자리마다 깔끔한 선이 생겨나고, 마지막으로 고무도장이 두 번, 탁탁 찍혔습니다. 소포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뒷문으로 사라졌습니다. 떠나는 것을 보며, 기도 생각이 났습니다. 말 몇 마디와 숨 한 번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어쩌면 기도는 저울 위에 올려진 사과처럼 분명한 무게를 지니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무에게도 자랑하지 못하고, 설명도 붙일 수 없는 마음의 핵심이 거기에 담기기도 하니까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사무엘상 16:7). 오래전부터 익숙한 문장이 오늘 우체국에서 새로 들렸습니다. 세상은 자주 크기와 속도, 효율로 값을 매기지만, 주님은 그 안쪽을 들여다보신다는 뜻이 이렇게 일상 속에서도 고개를 들었습니다. 무게가 아닌 넓이로, 넓이가 아닌 깊이로, 그리고 깊이보다 더 안쪽에 있는 마음으로 삶을 재보시는 분. 그 생각을 하니, 사과 두 알이 갑자기 든든한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제 앞 순서의 남자는 얇은 카드 한 장을 봉투에 넣었습니다. 글씨는 짧았고, 문장 끝에 작은 점 하나가 또렷했습니다. 그렇게 작은 점 같은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말없이 쥐고 있던 서운함이 며칠씩 마음을 무겁게도 하지요. 같은 하루라도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무게가 됩니다. 쌀포대를 들 때의 묵직함과 빈 봉투의 가벼움이 다르듯, 부담과 위로의 무게는 닮았으면서도 다른 표정을 띱니다.
제 차례가 되어 창구로 나아가며 가방에서 소포를 꺼냈습니다. 오래 아시는 분을 위한 작은 책 한 권과, 사이에 끼워놓은 짧은 쪽지. ‘당신 생각이 났습니다.’ 그 문장을 새삼 부끄럽지 않게 적을 수 있었던 건, 마음의 무게를 믿어보기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울 위에 상자를 올려놓는 순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눈금은 제 갈 길을 찾아가듯 멈추었고, 직원은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문을 나설 때 유리문에 제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습니다. 손에 남은 종이테이프의 끈끈함과 도장의 잉크 냄새, 그리고 아직 따뜻함이 남은 소포의 면이 함께 기억에 붙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떠올려보니, 말로 적을 수 있는 성취보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마음자리를 더 오래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조용히 기도했던 순간, 떠올랐던 얼굴들, 덜컹거리던 마음을 잠시 내려둔 숨 한 번. 그런 것들이 오늘의 무게를 만들었습니다.
우체국 뒤편 작업대 위에서는 또 다른 상자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 닿는지, 그 길을 다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상자는 떠났고, 누군가의 문 앞에서 조용히 멈출 것입니다. 기도도 그러하겠지요. 내 뜻대로 운반되지 않을 때가 있어도, 보이지 않는 손길이 어김없이 품어 주시는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마음이 사과 두 알만큼이라도 단단하게 묶여 누군가에게 가 닿는다면, 그걸로 충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우체국 저울이 그러했듯 묵묵히 알아주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이미 절반의 응답처럼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