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2월 24일 07시 01분 발행
오전 내내 시간이 길어지는 날이 있습니다. 병원 대기실, 손에 쥔 번호표가 얇은 종이인데도 묘하게 묵직하게 느껴집니다. 의자 표면의 비닐이 미세한 소리를 내고,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소독약 냄새와 바깥 공기의 습기가 살짝 섞여 들어옵니다. 반대편 벽에는 둥근 수족관이 낮은 조명 아래서 은근한 빛을 비춥니다. 양동이만 한 세계 속에서 금빛 몸들이 천천히 선회하고, 플라스틱 산호 사이로 공기방울이 별처럼 떠올랐다가 소리 없이 흩어집니다. 아이 하나가 유리를 톡톡 건드리고, 옆자리 어르신은 무릎 위 코트를 가지런히 겹쳐 올립니다. 전광판 숫자는 제 마음과는 다른 속도로, 아주 느긋하게 한 칸씩 움직입니다.
기다림은 마음을 얇게 흔듭니다. 아직 오지 않은 대답이 자꾸 앞질러 상상되고, 말로 담기지 않는 근심이 목 깊은 곳에서 둥글게 뭉칩니다. 그런데 수족관 속을 오래 바라보고 있자니, 그곳의 시간은 이상하리만큼 부드럽습니다. 금붕어의 꼬리 끝이 일으킨 물결이 작은 원으로 번지고, 그 조용한 흔들림이 다른 물고기의 길을 조금 바꿉니다. 같은 길을 도는 것 같지만, 매 순간 다른 곡선이 그려집니다. 우리 하루가 늘 같아 보이면서도 소리 나지 않게 달라지는 것도 아마 그런 까닭이겠지요. 누군가 건넨 한숨 하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지연, 밥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 같은 것들이 우리의 감정을 아주 조금 옮겨 놓습니다.
말하지 못한 피곤함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습니다. 어쩌면 물을 새롭게 하는 것은 크게 뒤집는 힘이 아니라, 쉼 없이 순환시키는 작은 호흡일지 모르겠습니다. 수족관 모터의 낮은 윙 소리가 물을 돌리듯, 드러나지 않는 돌보심이 사람 사이를, 마음 속을 흐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어느 순간 이 말씀이 고요하게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아직 입술로 말 꺼내기 전에도 알아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만으로, 가슴께 어딘가가 조금 풀리는 것 같습니다.
전광판이 한 번 더 바뀌자, 몇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집니다. 파일을 정리하던 손이 잠깐 멈췄다가 서랍 같은 가방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사이 금붕어 하나가 산호 뒤를 돌아 나옵니다. 유리 표면에는 대기실의 풍경이 엷게 겹쳐 비칩니다. 마스크의 선, 주름진 손등의 푸른 혈관, 젤리 포장지를 여는 조심스러운 소리. 각각의 이야기가 물빛 위에서 잠시 하나의 그림을 이룹니다. 우리가 서로 모르는 채로 서로의 시간을 조금씩 나눠 쓰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덜 외롭게 만듭니다.
기다림은 멈춤 같지만, 안쪽에서는 움직임이 계속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뭔가가 천천히 가라앉고, 다른 것은 천천히 떠오릅니다. 어떤 날은 그 움직임을 이름 붙이기 어렵습니다. 용기라고 부르기에는 어설프고, 체념이라 하기에는 따뜻합니다. 아마 자신을 참아 보는 연습에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일, 이유를 서둘러 묻기보다 온도를 먼저 알아차리는 일, 그런 것들이 마음의 바닥을 반듯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람마다 지닌 물의 온도는 다릅니다. 불안이 쉽게 데워지는 분이 있고, 오래 식지 않는 기억을 안고 사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물결의 언저리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설명보다 동행이, 판단보다 관찰이 더 가까이 와서 앉는 시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작은 변화를 보아 주는 시선이 서로에게 건너갈 때, 숨이 한 번 더 고르게 이어집니다. 수족관의 방울이 터진 자리에서 아주 미세한 반짝임이 남듯, 우리의 마음에도 방금 지나간 흔들림이 빛으로 남습니다.
잠시 뒤 누군가의 이름이 불리고, 또 다른 누군가의 이름이 이어집니다. 차례가 가까워오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손에 쥔 번호표를 주머니 속으로 가만히 넣게 되겠지요. 그 순간 본능처럼 수족관 쪽을 한 번 더 보게 될 것 같습니다. 방금 지나간 방울의 길, 곡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 유리 가장자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머무는 작은 반짝임. 마음 어딘가에서도 비슷한 일이 진행 중일지 모릅니다. 천천히 가라앉으며 맑아지는 움직임, 서두르지 않아도 자리를 찾아가는 물결. 오늘을 지탱해 줄 힘이 어쩌면 거기에 이미 와 있는 듯합니다. 물속 빛처럼, 아무 소리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