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2월 25일 07시 01분 발행
시장 끝자락, 자그마한 우체국에 들렀습니다. 낮은 천장 아래로 고무도장이 탁,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간간이 울렸습니다. 번호표 종이는 얇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사연은 두툼해 보였습니다. 유리창 건너 창구 직원의 손놀림은 잔잔했고, 물을 먹인 작은 스펀지컵에서 우표 모서리가 조용히 젖었습니다. 두 칸 앞에 선 어르신은 “깨짐 주의” 스티커를 붙인 상자를 내어놓으셨고, 제 뒤의 어린아이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힌 엽서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각자 다른 무게와 다른 주소, 그러나 도장은 모두 오늘의 같은 날짜를 품었습니다.
서류 봉투를 건네며 문득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비슷한 길을 건너는구나. 말로 다 옮길 수 없는 것들은 종이에, 종이로 담기지 않는 것들은 침묵에 붙여 보내게 되나 봅니다. 어떤 마음은 속달로, 어떤 마음은 느린 우편처럼 천천히 움직입니다. 분실을 염려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우편은 길을 압니다. 보낸 이의 조급함과는 별개로 정해진 경로를 지나, 보이지 않는 손들이 차근차근 이어 줍니다.
창구의 저울 위에서 봉투가 아주 잠깐 숨을 멈추듯 멈춰 섰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직원의 말에, 괜히 제 마음도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혹시 우리 마음도 이렇게 무게를 재어 보는 순간이 필요할까요. 덜 붙인 우표처럼 미묘한 부족함이 있지는 않은지, 필요 이상의 우표를 붙여 스스로를 과장하지는 않았는지, 잠깐 멈춰 살피는 그 순간 말입니다. 사실 가장 정확한 주소는 종종 간단한 한 문장일 때가 있습니다. “수고했다.” “괜찮다.” “기다리고 있다.” 말은 짧지만, 상대의 서랍 깊숙이 오래 머무는 문장들입니다.
기도를 떠올리면, 우체국 창구의 풍경이 겹쳐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말을 조심스레 봉투에 담아 올려놓으면, 하늘의 창구는 놀라울 만큼 조용하고 신실하게 접수해 주는 듯합니다. 도착증명 같은 서류를 곧장 받지 못할 때가 더 많지만, 분명히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확신이 마음 한편에 생깁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처럼,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8). 주소를 제대로 적지 못해도, 떨리는 손끝을 읽어내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를 지탱합니다.
가끔은 반송도 있습니다. 돌아온 봉투의 상처 난 모서리를 쓰다듬으며, 주소를 고쳐 다시 보내는 일을 배웁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되는 건, 잘못 보낸 시간이 꼭 헛수고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른 길로 가야 하는 신호일 수도 있고, 아직 받는 이가 문을 열 준비가 되지 않은 때일 수도 있습니다. 기다림은 우편의 한 부분이듯, 삶의 한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엽서를 들고 있던 아이가 자신의 키만 한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보고 싱긋 웃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전할 말이 있다는 건, 오늘을 다르게 살아 보려는 마음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우표의 작은 그림 하나에도 계절의 빛이 숨어 있듯, 우리의 말 한마디에도 계절이 깃듭니다. 따뜻한 계절을 오래 보내고 싶은 날이 있는가 하면,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는 날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체국의 도장은 언제나 오늘을 찍습니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오늘.
봉투를 건네고 밖으로 나오자 주머니가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들고 있던 무게가 내 손을 떠났기 때문이겠지요.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탁자 위에 놓일 작은 메모, 낯선 도시의 우체함에서 울릴 금속성의 가벼운 소리, 그 순간의 미소.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어딘가에 가 닿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의 도장 소리가 귀에 남습니다. 탁, 하고 분명한 울림. 그 소리만으로도 어떤 날은 충분해 보입니다. 오늘이라는 날짜가 당신의 마음 위에도 또렷이 찍혀 있기를, 그래서 내일의 우편함에서 조용한 기쁜 소식 하나를 꺼내 들 수 있기를, 그런 바람을 조용히 품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