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울이 말해 주지 않는 것들

📅 2025년 12월 27일 07시 01분 발행

늦은 오후, 동네 우체국 창구 앞에 섰습니다. 차례를 알리는 작은 전광판이 숫자를 바꾸는 사이, 테이프가 쩍 하고 떨어지는 소리, 도장이 탕 하고 찍히는 소리가 공기 속에 동그랗게 퍼졌습니다. 종이 냄새와 비닐 냄새가 섞인 그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봉투에 넣어 건네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생일이 지나버린 선물을, 누군가는 진단서 한 장을, 누군가는 해외로 가는 얇은 상자를 올려놓았습니다. 저는 편지 한 통과 사진 몇 장을 흰 봉투에 넣어 저울 위에 올렸습니다. 붉은 숫자가 깜박이며 자리 잡는 그 짧은 찰나, 오늘 하루가 얼른 눈을 맞추고는 조용히 몸을 가누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울은 무게만을 말해 줍니다. 사연이 얼마나 오래 멀미를 했는지, 그 안에 눌어붙은 마음 냄새가 어떤지, 봉투를 닫을 때 망설임이 몇 번이나 다녀갔는지는 모릅니다. 숫자는 정확하지만, 정확함이 전부는 아니지요. 가볍게 던진 제 농담이 누군가의 어깨를 하루 종일 눌렀을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밤새 붙들고 있었던 제 염려는, 막상 빛에 비춰 보면 봉투 모서리의 굴곡처럼 작을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잴 때는 늘 오차가 생깁니다. 마음의 저울은 기억에 흔들리고, 자존심에 기울고, 피로에 미세하게 떨립니다.

창구 직원이 묻습니다. 등기, 일반, 빠른. 삶도 비슷합니다. 어떤 위로는 급히 도착해야 할 것 같은데, 돌아보면 천천히 온 위로가 더 깊이 스며 있었습니다. 사과는 늦었지만 제때였던 적이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때로는 등기처럼 도착 확인이 붙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낸 마음이 허공에 사라지는 일은 없다고, 저는 그 믿음에 기대어 서 있습니다. 복음서 어디에선가,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세신다고 하셨지요. 무게만이 아니라, 그 속의 결까지 아시는 분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봉투 위에 우표가 붙었습니다. 손톱만 한 종이에 작은 새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값이 적힌 숫자는 분명하고 단정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늘 값을 셉니다. 이해에 드는 수고, 오해에 드는 시간, 기다림에 드는 마음의 체력. 하지만 돌아보면 제가 계산한 적 없는 선의들이 이미 길을 깔아 주었습니다. 자동문을 오래 잡아 주던 낯선 손,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며 환하게 웃던 얼굴, 내 이름을 정확히 불러 주던 목소리. 그 호의들이 제 하루를 포장했고, 흔들리던 마음 사이를 완충재처럼 채워 주었습니다.

저울 위 수치가 정해지면 창구 너머 기계는 군말이 없습니다. 영수증이 뽑히고, 봉투는 길을 떠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보내는 일뿐입니다. 마음의 짐들도 때로는 그렇게 떠나보내지 못해, 자꾸만 손끝에 맺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그 무게가 ‘착불’처럼 남겨져 돌아오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선불’처럼 이미 건너가 잔잔한 평안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결국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닿는다는 사실입니다. 닿는 자리에서 우리는 새로운 호흡을 배우고, 새로운 균형을 익혀 갑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머니 속 영수증이 구겨져 있었습니다. 숫자는 금방 잊히겠지요. 그러나 오늘 저울 위에서 잠깐 멈추어 선 마음의 감각은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하루를 조용히 펼치면, 몇 번의 한숨과 몇 줄의 감사, 주머니 속 동전처럼 부딪히던 생각들, 지나가다 문득 건네받은 한마디의 안부가 보입니다. 숫자로 새기지는 못해도, 기억의 종이에 또렷이 눌어 찍힌 흔적들입니다.

저울은 말해 주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다행입니다. 무게만으론 헤아릴 수 없는 것을 누군가는 전부 기억하고 계시니까요. 너무 가벼워 불안했던 날에도, 너무 무거워 잠을 설쳤던 밤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 저울의 바늘에 닿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균형 있게 붙들어 주고 있었음을, 오늘 우체국의 짧은 기다림 속에서 조용히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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