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럼 통 안의 시간

📅 2025년 12월 29일 07시 01분 발행

해가 기울 무렵, 동네 빨래방에 들렀습니다. 플라스틱 의자 몇 개가 서로를 향하지도 않은 채 놓여 있고, 동전 교환기의 작은 불빛이 조용히 깜박였습니다. 투명한 문 너머에서 드럼 통이 천천히 돌아가며 옷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젖은 천이 서로 스치며 내는 부드러운 소리가 심장 박동과 비슷해 보여서 한참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세제 향기가 공기 속에 아주 얇게 퍼져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양말, 누군가의 앞치마, 폭이 넓은 티셔츠가 같은 원 안에서 뒤섞였습니다. 각자의 얼룩과 냄새가 있었을 텐데, 물이 그것들을 품어 안고 조금씩 풀어 내는 모습이 묘하게 위로처럼 느껴졌습니다. 급하게 문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좋았습니다. 기다려야 했고, 그 기다림이 일을 해 주고 있었습니다.

표시창에 남은 시간이 숫자로 내려갔습니다. 24, 23, 22. 같은 동작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매 순간 다른 물이 흘렀고 다른 거품이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하루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길을 오가는 듯해도, 어제의 말과 오늘의 숨, 어젯밤의 마음과 오늘 아침의 체온이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차이가 우리를 조금씩 달라지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얼룩은 금세 지워지는가 하면, 오래된 자국은 물 속에서 한참을 불려야 빠졌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서운함과, 한 번에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금방 해결되지 않는 것들 앞에서 무력해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드럼 통 안에서는, 불림과 헹굼과 탈수가 제 순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물이 일을 마치고 나면 소리가 잠잠해지고, 그 고요 직후에 들리는 짧은 진동이 마치 끝을 알려주는 종소리 같았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고, 잠잠하고 신뢰함이 너희의 힘이 될지니라”(사 30:15). 빨래가 잘 되려면 물과 시간과 알맞은 온도가 필요하듯, 마음도 조용히 놓여 있을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손을 쓰지 않는 동안에도 일은 진행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세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음이 복잡한 날에는, 드럼 통을 바라보는 일이 기도가 되었습니다. 무엇을 더하려 애쓰기보다, 이미 시작된 일 앞에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서로 부딪히던 천이 점점 부드러워지는 것처럼, 하루 동안 마음에 달라붙은 말과 표정이 물살을 타고 풀려 나갔습니다. 그래도 끝내 남는 주름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주름은 잘못이 아니라, 살아온 방향과 속도를 보여 주는 지도 같았습니다. 다림과 햇살의 시간이 또 이어질 테지요.

탈수가 끝나고 문을 열었을 때, 옷감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손등을 감쌌습니다. 깔끔해졌다는 느낌보다, 누군가 나를 조심스레 돌봐 주었다는 느낌이 먼저 왔습니다. 삶이 생각보다 거칠게 굴러갈 때가 많지만, 그 거침을 감당하도록 돕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다는 확신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작은 양말 한 켤레도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이렇게 많은 과정과 기다림을 지나옵니다.

오늘도 각자의 드럼 통이 돌아갔을 것입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이 물속에서 한 번쯤 뒤집혔고, 고집처럼 딱딱하던 생각이 조금은 부드러워졌을지 모르겠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적어 보여도, 기다림이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저녁이 알려 줍니다. 숫자가 0으로 바뀌는 순간이 오면, 문은 스스로 열리고, 우리는 손으로 그 결과를 조심히 받아 들게 됩니다.

저는 그 순간, 지나온 시간을 가늠하는 대신 손끝의 온기를 먼저 기억하려 합니다. 충분히 돌고, 충분히 흔들리고, 충분히 씻겨 나간 날들이 쌓여 우리를 만든다는 것을요. 조금 가벼워진 옷가지를 개키며, 마음 한쪽에서도 같은 주름이 천천히 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느낌이면 오늘은 괜찮다고, 조용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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