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1월 01일 07시 02분 발행
늦은 오후, 병원 대기실의 공기는 소독약 냄새와 낮은 숨소리가 겹쳐 있었습니다. 번호표 전광판이 조용히 숫자를 바꾸고, 누군가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공기가 살짝 흔들렸습니다. 그 사이, 창가 옆 유리 어항이 밝은 조명을 받아 작은 우주처럼 빛났습니다.
거품이 바닥에서 톡, 하고 올라와 천천히 터졌습니다. 금빛 비늘 한 마리가 둥글게 방향을 틀고, 산호 모형 옆으로 그림자가 따라붙었습니다. 물결은 규칙 없이 흔들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흔들림 속에 일정한 리듬이 숨어 있는 듯 보였습니다.
이름이 불리기 전의 시간은 늘 길게 늘어집니다. 벽시계의 초침은 정확히 움직이지만 마음의 시계는 자꾸 멈칫거립니다. 어항에서 올라오는 기포처럼, 생각이 표면에 닿았다 터지고, 또 다른 생각이 어둑한 바닥에서 떠오르곤 했습니다.
옆자리에는 잠든 아이의 손을 꼭 잡은 어머니가 앉아 계셨습니다. 손등에 눌린 작은 하얀 자국이 오래된 피로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반대편에는 접힌 영수증을 거듭 펴 보시던 어르신이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셨습니다.
몸은 의자에 먼저 착석하지만, 마음은 조금 늦게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숨을 몇 번 들이쉬다 보면, 허공에 떠 있던 마음의 먼지가 아주 천천히 가라앉습니다. 어항의 모래알이 물러앉으며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과 닮아 보였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말보다 숨이 먼저 기도가 됩니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 놓이는 짧은 고요, 그 사이로 보이지 않는 손길이 스며드는 듯했습니다.
문득 오래전 동네 수족관이 떠올랐습니다. 문을 열면 콤프레서 소리가 낮게 깔렸고, 주인 어른의 손은 늘 물에 젖어 있었지요. 그 손이 작은 생들의 물살을 다루던 모습이 오늘의 어항에 겹쳐 보였습니다.
기다림에는 늘 크고 작은 두려움이 깃듭니다. 결과라는 단어는 때로 납처럼 무겁고, 마음은 그 무게를 견디기 위해 스스로를 더 작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그 작아짐 속에서 귀해지는 것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서로의 체온, 눈인사, 가만히 건네지는 물 한 컵 같은 것들입니다.
어항 위로 내리쬐는 조명이 물결에 부서졌다가, 곧 다시 하나의 빛으로 모였습니다. 마음도 그랬습니다. 흩어졌다가 모이고, 잊혔다가 떠오르고, 그렇게 하루를 통과합니다. 완벽하지 않은 리듬이 오히려 사람의 숨에 가깝습니다.
“너희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느니라” 하신 말씀이 불쑥 떠올랐습니다(마태복음 10:30). 세세한 것까지 헤아리신다는 그 표현이, 유리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물빛처럼 가슴 안에서 번져 나갔습니다. 큰 대답보다 작은 돌봄이 먼저 도착하는 순간이 있음을, 마음이 알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들리지 않는 음악을 따라 걷는 날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어항의 규칙 없는 물소리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기다림 속에서도 생은 여전히 움직이고, 숨은 자기 길을 찾아 흐릅니다.
잠시 뒤 이름이 불렸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항을 한 번 더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느려 보이던 물고기가 다른 각도에서 더 가벼워 보였습니다. 같은 물, 같은 빛, 다만 제 발걸음이 조금 달라진 탓이겠지요.
사람마다 마음속에 자기 어항 하나쯤은 있으실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도 쉽게 꺼내 보이지 않는 투명한 물, 거기 떠 있는 말 못 할 근심들, 그리고 그 사이를 유영하는 희망의 반짝임. 그 물이 맑아지는 데에는 큰 손짓보다 조용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대기실을 나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었습니다. 형광등 불빛이 바닥에 긴 선을 만들고, 발자국마다 작은 소리가 났습니다. 소리들이 서로 겹쳐 하나의 박자가 되었고, 그 박자는 마음 안의 동요를 조금씩 눌러 주었습니다.
하루의 크기는 늘 같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은 작게 줄어들고, 어떤 날은 손에 쥘 수 없을 만큼 커집니다. 크기와 상관없이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그날의 끝에는 누군가의 시선이 다정하게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주머니 속 진동벨이 멈춘 자리에서 열이 빠져나가듯 마음도 조금 식었습니다. 식음 사이로 맑아진 생각이 하나 자리 잡았습니다. 불확실한 시간조차 우리의 생을 이루는 재료라는 것, 그래서 헛되지 않다는 것.
어항 속 금빛 비늘이 한 번 더 반짝였습니다. 그 빛이 제 발등을 스치듯 내려와 잠깐 머물렀습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짧은 머밈이 오늘을 견딜 만한 온기를 남겼습니다.
이름이 불리기 전에도, 그리고 불린 다음에도 돌봄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차리든 못 알아차리든, 물은 흐르고 빛은 갈라졌다가 다시 모였습니다. 그 사이를 지나며 마음이 천천히 제 자리를 찾아가는 저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