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1월 11일 07시 01분 발행
오래된 서랍 맨 뒤에 둥근 깡통 하나가 있습니다. 낡은 라벨이 반쯤 벗겨져 무슨 과자였는지 알아보기 어렵지만, 뚜껑을 열면 작은 세계가 고요히 드러납니다. 단추들이 서로에 기대어 누워 있습니다. 맑은 초록, 저녁빛 남색, 오래된 우유빛, 유리처럼 투명한 것까지, 모양과 크기, 울림이 모두 다릅니다. 깡통을 기울이면 자잘한 소리가 납니다. 비 오는 날 지붕에 떨어지는 첫 몇 방울 같기도 합니다.
하나씩 손에 올려 살펴보게 됩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울퉁불퉁함, 뒤편에 남아 있는 실의 매듭, 세탁으로 거칠어진 표면. 어떤 단추는 유난히 무겁습니다. 겨울 코트에서 떨어졌을까요. 어떤 것은 가벼워 손바닥에서 한 번에 사라질 듯합니다. 어린 손가락이 처음이나 다름없이 채워 보았던, 그 작은 스웨터의 단추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름이 없는 조각들인데, 이상하게도 마음속 어딘가로 곧장 닿습니다.
세월은 종종 크고 선명한 사건들로 기억되지만, 사실 많은 하루는 이런 자잘한 것들에 붙들려 있습니다. 옷을 여미게 하는 것은 커다란 장식이 아니라 끝자락의 작은 고리와 단추입니다. 사람 사이도 비슷한 날이 많습니다. 위로의 한마디, 식탁 위에 함께 올린 젓가락, 늦은 시간에도 불빛을 켜 두던 습관 같은 것들이 마음의 옷깃을 단단히 붙들어 줍니다. 그 작은 매듭이 풀리면 관계는 생각보다 쉽게 헐거워져 버립니다.
오늘은 마음속 단추들을 하나씩 건져 올리는 밤이었습니다. 가지런히 짝을 맞춰 보다가, 쉽게 짝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만났습니다. 삶에도 그렇게 남은 것들이 있습니다. 대답하지 못한 인사, 끝맺지 못한 사과, 어느 모퉁이에 미처 두고 온 웃음 한 조각. 어쩌면 다시는 같은 자리에 달리지 못할 단추들이겠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깡통 속에서 그 단추들은 버려지지 않습니다. 자리를 양보하고 서로 사이를 메우며, 언젠가 누군가의 옷에 어울릴 때를 잠자코 기다립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한복음 6:12)라는 말씀이 마음에 낮게 울립니다. 기적의 한복판에서도 남은 빵 부스러기들을 소중히 모으셨던 예수님의 손길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군가는 가치 없다고 여길지도 모르는 시간과 마음의 조각들, 우리 각자의 서랍 속에 남아 있는 미완의 이야기들을 하나님은 쉽게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늘의 피곤한 숨, 건조해진 눈빛, 말끝에서 삼킨 생각까지도 그분의 손바닥에 모여 조용히 빛을 되찾습니다.
바늘에 실을 꿰다 보면 실끝이 잘 맞지 않아 몇 번이고 입김을 적시게 됩니다. 그 사이 작은 따끔함이 손가락 끝을 스치기도 합니다. 그 순간이 묘하게 위로가 됩니다. 고쳐 달 수 있는 것과 차라리 빈 자리로 남겨 두어야 할 것이 자연스레 구분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깡통 속에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단추들이 여럿 남아 있어도 괜찮습니다. 기다림 또한 어엿한 자리가 되어 줍니다.
뚜껑을 닫으면 단추들이 가볍게 한 번 더 부딪히며 잠잠해집니다. 오늘도 완벽하게 여며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옷은 여전히 우리를 덮어 주고, 작은 단추 하나가 생각보다 큰 온기를 건네 줍니다. 서랍을 닫는 소리 뒤로, 마음에도 조심스레 닫히는 한 켠이 생깁니다. 내일 현관 구석에서 잃어버린 단추 하나를 우연히 발견하게 될지, 아니면 그대로 떠나보내게 될지 모릅니다. 어느 쪽이든 이 밤은 남은 조각을 버리지 않는 방향으로 조용히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 기울기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