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2월 08일 07시 01분 발행
비가 그치고 난 늦은 오후, 동네 세탁소 유리문에 잔물기가 가늘게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안쪽 둥근 창 너머로 흰 거품이 부서지며 옷들이 고요히 돌고 있지요. 서로 부딪히며 묵직했던 자락이 가벼워지는 모양을 보다 보면, 오늘 하루의 무게도 그 안에서 조금 덜어지는 듯했습니다. 사장님은 도톰한 손으로 카라의 얼룩을 작은 솔로 톡톡 건드리셨고, 드라이클리닝 비닐은 바람도 없이 사각사각, 낮은 소리를 냈습니다.
한 벌의 코트를 맡기며 무심코 얼룩을 가리키자, 사장님은 눈으로 결을 따라 조용히 더듬어 보시곤 한마디 하셨습니다. “이건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어요.”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어떤 것들은 세게 비빈다고 빨리 지워지지 않지요. 되려 번지는 얼룩처럼, 마음의 근심도 성급히 다루면 자리만 옮겨 더 넓게 퍼질 때가 있습니다.
세탁기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습니다. 이제는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물과 비눗물과 온기, 반복과 침묵이 할 몫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작은 종이표를 하나씩 쥐고 자리를 비킵니다. 그 종이표에는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름이 또렷이 적히는 순간, 보이지 않는 약속이 이미 시작된 듯했습니다. 맡겨진 것이 돌아올 자리까지 조심스레 준비되어 있다는 뜻일 테지요.
옷은 몸의 시간을 기억합니다. 팔꿈치가 살짝 헤진 부분에는 오래 엎드려 있던 오후와, 주머니에서 구겨져 나온 영수증에는 그날의 허둥거림이 스며 있습니다. 빨래는 기억을 지우기보다 냄새를 덜고 결을 다시 살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의 일도 그와 닮아 보였습니다. 다 사라지지 않아도, 다시 입고 걸을 만큼 가벼워지는 때가 있지요.
어느 구절이 조용히 떠올랐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이사야 42:3). 다림질대 위에 놓인 얇은 블라우스처럼, 사람의 마음도 너무 뜨거운 열에 닿으면 쉽게 상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집의 스팀은 가까우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지켰습니다. 김이 올랐다 사라지는 사이, 주름은 말없이 펴졌습니다. 관계도 그럴 때가 있지요. 서둘러 해명을 쌓기보다, 가까우되 지나치지 않게, 말보다 시간이 일하도록 자리를 내주는 일 말입니다.
드럼이 마지막 회전에 들자, 안쪽의 물방울들이 원을 그리며 가장자리로 흩어졌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가운데도 보이지 않는 원심이 생겨 무거운 생각들이 조금은 변두리로 밀려나는 듯했습니다. 붙들고 있던 말들이 멀어지는 동안, 안쪽에 남는 것은 의외로 소박합니다. 숨의 길이, 식지 않은 차 한 잔의 온기, 누군가 부쳐 온 짧은 안부 정도였습니다.
유리문 밖으로 해가 비스듬히 기울 때, 걸려 있는 비닐은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사각사각 흔들렸습니다. 준비된 옷걸이마다 얇은 종이표가 달려 있었고, 그 작은 표 하나에도 누군가의 하루가 차분히 매달려 있는 듯했습니다. 요란하지 않지만 분명한 시간, 맡겨진 것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사람의 표정은 풀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코트의 무게가 달라진 것을 곧잘 느끼게 되곤 합니다. 얼룩의 자국이 미세하게 남아 있을지라도 천의 결이 다시 숨 쉬는 기색이 납니다. 우리 안의 오래된 근심도 이와 닮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완벽한 새것이 되지 않아도, 어깨를 다시 펴고 한 걸음을 내딛게 하는 만큼의 가벼움. 오늘이 그만큼을 허락했다면, 그것으로 이미 넉넉하다는 마음이 뒤따릅니다.
세탁소 쇼케이스에 비친 저녁빛이 길어질수록, 마음속 빛도 천천히 길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름이 불리고, 맡겼던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우리 또한 보이지 않는 손길 속에서 제 자리를 배워 가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조용한 회전이 끝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들리는 안도의 숨이, 오늘에도 어김없이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듯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