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3월 09일 07시 00분 발행
오후 느즈막한 시간, 동네 우체국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자동문이 닫히고 나니 바깥의 소란이 한 겹 접히듯 잠잠해졌지요. 번호표 기계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이 나올 때, 잉크 냄새와 함께 손끝에 아주 가벼운 따뜻함이 스쳤습니다. 차가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그 얇은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기다렸습니다. 전광판의 숫자가 하나씩 오르는 소리, 창구 너머에서 봉투를 펴고 주소를 확인하는 직원의 정성스런 손놀림이 이 방의 시간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기다림은 언제나 마음을 들쑤시곤 합니다. 내 차례가 오기까지 몇 사람이나 남았는지 가늠하게 되고, 앞사람의 긴 설명이 끝나기를 속으로 바라게도 되지요.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느린 시간이 누군가의 사정을 품고 있는 순간임을 보게 됩니다. 한 글자 틀리지 않게 받는 주소, 접힌 모서리를 다시 펴는 움직임, 우표를 고르는 짧은 망설임. 서두름 대신 세심함이 이곳의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문득, 믿음의 길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은 조급한 분이 아니시지요.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는 약속이 흐르는 듯했습니다. 어떤 이름도 섞여 사라지지 않고, 어느 번호도 덧없이 지나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조용히 가슴에 머물렀습니다.
전광판에 제 숫자가 밝혀지던 순간, 아주 작은 떨림이 발끝에서 올라왔습니다. 몇 걸음 사이에 지난 시간을 다 건너오는 듯한 느낌이었지요. 눈곱만 한 걱정들이 한 줄로 서 있다가 툭툭 떨어져 나가는 사이, 내가 여기까지 와 있었다는 사실이 또렷해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삶은 이렇게 수많은 차례로 이어졌습니다. 병원 대기실, 입학 발표 게시판, 면접장 복도, 아기의 울음이 시작되던 새벽,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납빛의 오후. 그때마다 우리의 시간은 너무 느리거나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듯 보였지만, 지나고 나면 하나하나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새로 뜨는 숫자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속 전광판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 듯 보여도, 방 안의 공기는 이미 다음을 준비하고 있는 때가 있지요. 우체국의 유리창에 스치는 햇빛처럼, 말 없이 다가오는 차례가 있습니다. 손에 쥔 종이 한 장의 온기를 기억하게 되는 날, 아직 불리지 않은 자리에서도 이미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이 조용히 확인됩니다. 숫자가 넘어가기 직전의 정적이 괜히 마련된 공백이 아니었던 것처럼요.
창구를 떠나 나올 때, 종이는 금세 필요 없어진 작은 물건이 되었지만 한동안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 종이가 손바닥에 남겨 둔 미묘한 온기가 하루를 천천히 걸어가게 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순간에도 누군가의 부름은 이미 우리 쪽으로 오는 중이었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늦은 햇살처럼 데우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