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 바느질 상자

📅 2026년 03월 13일 07시 02분 발행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던 바느질 상자를 꺼냈습니다. 덜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단추가 담긴 작은 깡통이 굴러가고, 오래전 누군가의 옷에서 떨어졌을 법한 단추들이 서로 부딪혀 잔잔한 소리를 냅니다. 손끝에 잡히는 실 한 꾸러미는 색이 조금 바래 있었고, 짧은 가위는 여전히 날이 살아 있었습니다. 표면에 손을 대니 비누 냄새와 약간의 금속 냄새가 섞여 올라옵니다. 오랫동안 방치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꺼낼 것을 알고 기다려 온 물건들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실타래 한쪽이 엉켜 있었습니다. 처음엔 습관처럼 힘주어 잡아당겼습니다. 그랬더니 실은 더 단단히 조여들어 작은 매듭을 여러 겹으로 만들었습니다. 잠시 멈춰 손을 툭 놓자, 요란하던 마음이 조용해졌습니다. 방향을 바꿔 느슨한 고리를 찾고, 실의 숨결이 지나갈 길을 더듬어 보니 매듭은 생각보다 쉽게 풀렸습니다. 인생의 매듭도 이와 비슷한 때가 있습니다. 참지 못해 단박에 해결하려 들수록 더 단단해지고, 잠시 손을 떼고 빛을 비껴 보낼 때 스르르 풀려 나가는 순간이 있습니다.

줄자를 펴 보니 노란 리본 같은 띠에 1, 2, 3이 단정히 서 있었고, 용도에 따라 얼마나 덧대야 하는지 숫자가 알려 주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의 하루도 길이로만 재면 너무 정확해져서 오히려 비좁아지는구나. 같은 열두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숨 막히는 죄수복처럼 느껴지고, 다른 이에게는 여유로운 스웨터처럼 늘어나는 것은, 그 안에 덧대어진 마음의 시접 때문이겠지요. 시접이 넉넉하면 움직임이 편안해지고, 작으면 금세 봉제선이 터집니다. 오늘 제 마음의 시접은 얼마나 남아 있었을까요.

가끔은 그 매듭이 사람의 말에서 생깁니다. 오해와 서운함이 한 올씩 얽혀 어느새 단단한 매듭이 됩니다. 그럴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바늘귀에 실을 꿰던 저녁이었습니다. 잘 들어가지 않으면 실 끝을 살짝 적셔 모양을 다듬고, 한숨 길게 쉬신 뒤 다시 빛을 향해 바늘귀를 세우셨습니다. 무리하지 않고,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그 작은 동작 속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도 어쩌면 저렇게 숨을 적시고, 모양을 다듬고, 빛을 향해 세워야 지나갈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토마토 모양 핀쿠션에 꽂힌 바늘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지만, 하나도 싸우지 않았습니다. 제 역할의 차이가 다툼의 이유가 되지 않는 모습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어떤 바늘은 굵고, 어떤 바늘은 아주 가늘어 섬세한 천에만 쓰입니다. 사람도 그렇지요. 누구는 꿰매고, 누구는 덧대고, 누구는 매듭을 마무리합니다. 서로 다른 손끝이 모일 때 옷 한 벌이 완성되어 가듯, 삶의 한 장면도 그렇게 완성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옷자락의 해진 부분을 꿰매며 생각해 봅니다. 해어졌다는 건 다 닳아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많이 쓰였고 가장 자주 스쳤다는 표식일지도 모릅니다. 사랑도 그렇지요. 가장 많이 건드린 자리에서 실밥이 먼저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 자리를 다시 꿰매며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자주 닿았는지를 새삼 기억하게 됩니다. 바늘끝이 손가락을 스칠 때의 따끔함 또한 관계를 지킨 흔적으로 마음 한켠에 남습니다.

전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지요.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도서 4:12). 혼자서는 휘청일 순간, 하늘과 이웃과 나를 잇는 보이지 않는 세 올의 끈이 있습니다. 믿음은 첫 올처럼 조용히 버텨 주고, 사랑은 둘째 올로 상처 난 가장자리를 감싸며, 소망은 셋째 올로 아직 꿰매지지 않은 내일을 기다려 줍니다. 세 올이 서로 기대어 있으면 작은 충격에도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바느질을 마치고 상자를 닫으려다, 남은 실을 동그랗게 감아 고이 넣었습니다. 언젠가 또 필요할 날이 오겠지요. 완벽해서가 아니라, 다시 손 대어 이어 갈 마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때때로 풀리고 때때로 이어지는 과정 같습니다. 중요한 건 매듭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매듭을 붙잡는 우리의 숨, 기다림, 그리고 다정함일지 모릅니다.

오늘 마음 어딘가에도 작은 매듭 하나가 있었음을 인정해 봅니다. 누군가의 말 한 줄, 내 안의 후회 한 줌, 설명할 수 없는 막막함 한 스푼이 얽혀 있었을지요. 엉킨 실을 마주한 손처럼, 저는 잠시 멈추어 빛을 비껴 보며 느슨한 고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당기지 않기로 마음먹는 동안, 뜻밖의 길이 어렴풋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매듭은 여전히 매듭인 채로, 그러나 더는 숨을 막지 않는 모양으로 자리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제 바느질을 끝맺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봅니다. 언제나 그렇듯, 작은 바늘과 짧은 실이 해낸 일치고, 그 안에 담긴 마음이 만든 기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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