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3월 22일 07시 01분 발행
동네 안경점에 들렀습니다. 오래 쓰던 안경의 코받침이 눌려 귀가 조이는 듯했지요. 유리문을 미는 순간, 안에서 은은한 기계 소리가 잔물결처럼 퍼졌습니다. 기사님이 제 안경을 받아 작은 스테인리스 컵에 넣고, 투명한 물 위로 푸른빛을 켰습니다.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진동이 시작되자, 렌즈 주변으로 가느다란 기포가 일어 흩어졌습니다. 먼지와 기름기가 물속에서 가벼운 구름처럼 떠오르다 사라집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제 시야는 일시적으로 공중에 맡겨졌습니다. 안경 없이 세상은 불분명했고, 잠깐의 불편함이 따라왔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조금 느슨해졌습니다.
하루를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얼룩들이 쌓입니다. 급하게 내뱉은 말, 소리 없이 쌓인 염려, 미뤄 둔 일들의 그림자가 렌즈의 지문처럼 번져서 세상이 탁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이 흐리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지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제 눈을 덮고 있던 얇은 막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닦아내려면 먼저 벗어 놓아야 합니다. 잠시 보이지 않는 시간을 건너야 합니다. 물과 기다림, 그리고 아주 미세한 진동이 필요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안경을 물에 맡기는 동안 제 마음도 함께 내려놓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맡김은 배움이 아니라 감각으로 들어오는 법이더군요. 손에서 놓아야 물이 일을 합니다. 보이지 않는 파동이 표면을 흔들어 안쪽까지 닿듯, 보이지 않는 주님의 돌보심이 우리의 굳은 가장자리까지 스며드는 때가 있습니다. 크게 흔들지 않으시고, 조용히 진동하십니다. 소리 없는 파문이 한 겹, 또 한 겹.
세척이 끝났을 때, 기사님은 말없이 안경을 빛 아래 들어 보이셨습니다. 렌즈 위 남은 작은 흠집들이 얌전히 빛을 받았습니다. 큰 상처가 아니라, 살아온 자국들이었습니다. 다 닦아 없앨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습니다. 자국들은 때로 빛을 분산시켜 강한 빛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제게도 그런 흠집 같은 기억들이 있습니다. 고단함과 기다림의 점들이 연결된 선, 그리고 그 선 위로 머물렀던 은혜의 순간들.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 사이로 빛이 들어와 제 마음을 덜 아프게 만들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안경을 다시 쓰자, 세상이 바뀐 것은 아닌데 색이 한 톤 맑아졌습니다. 전보다 또렷해진 경계선이 오히려 사납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기사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시길래, 저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작은 가게를 나서며 유리문에 비친 제 얼굴이 조금 덜 지쳐 보였습니다. 맑게 보이는 눈앞에는 같은 길, 같은 사람들, 같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지요. 다만 제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집에 돌아와 안경닦이를 반듯하게 접어 책 옆에 올려 두었습니다. 방 안 공기가 저녁빛에 물들며, 렌즈 위로 둥근 빛점 하나가 잠깐 머물다 미끄러졌습니다. 오늘 제 마음에도 그런 빛점 하나가 지나간 듯했습니다. 혹시 오늘이 유난히 흐릿하게 느껴지셨다면, 그것이 세상의 잘못만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조용한 물과 보이지 않는 파동이 필요한 때가 있지요. 밤이 깊어질수록, 우리 안의 탁함도 가라앉고 맑은 면이 위로 떠오르면 참 좋겠습니다. 내일 아침, 같은 길을 다시 걸을 때, 같은 풍경이 조금은 다정하게 보일 수 있도록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