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봉투에 담긴 오후

📅 2026년 08월 11일 07시 01분 발행

동네 모퉁이를 돌아 작은 철물점에 들렀습니다. 유리 진열장 너머로 오랜 세월을 견딘 서랍들이 층층이 놓여 있고, 서랍마다 얇은 라벨에 ‘3mm 나사’, ‘경첩’, ‘와셔’ 같은 이름이 조용히 붙어 있었습니다. 기름 냄새와 금속 가루의 미세한 향이 공기 속에 섞여 있었고, 계산대 위에는 연필 끝이 좀 무디어진 붉은 연필이 누워 있었습니다. 가게 주인 어르신은 손바닥만 한 자석으로 바닥에 흩어진 나사를 모아 종이봉투에 옮겨 담았습니다. 작은 것들이 달그락거리며 한데 모이는 소리가, 늦은 오후의 빛과 잘 어울렸습니다.

낡은 문 경첩을 갈아보려 경첩과 나사를 사려 했습니다. 어르신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사는 너무 조이면 부러지고, 느슨하면 흔들리지요. 처음은 꼭 조인 것 같아도, 시간 지나면 또 손봐야 해요.” 그의 말이 허공에 가볍게 떠오르더니 제 마음속으로 천천히 내려앉았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다는 생각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관계가 먼 길을 함께 가려면, 꼭 맞춰야 할 순간과 조금 풀어두어야 할 순간이 번갈아 옵니다. 믿음의 숨도 그렇습니다. 어느 날은 웬만한 바람에도 버틸 만큼 단단하게, 다른 날은 눈물 한 방울에도 느슨해지는 저를 봅니다. 그러나 이 느슨함이 무너짐만은 아니구나, 제 마음 안쪽에서 그런 대답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이사야 42:3). 하나님은 우리를 새것으로 몽땅 갈아치우는 방식보다, 닳아진 자리에 맞춰 작은 나사 하나를 보태고, 헐거워진 경첩을 살짝 들어 맞추는 장인의 손길로 다가오시는 듯합니다. 종이봉투 안에서 부딪히는 금속 소리처럼, 작고 미세한 배려가 서로를 지탱합니다. ‘이 정도면 아직 괜찮다’는 무심한 체념과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급한 결론 사이에서, 들리지 않던 작은 소리들이 오늘도 우리를 부릅니다.

종이봉투를 받아 들고 나오는데, 봉투의 사각거림이 묘하게 안심이 되었습니다. 완벽한 새 문을 달아야만 열리고 닫히는 게 아니라, 덧댄 경첩과 맞바란 나사가 제 역할을 다할 때 문도, 마음도 다시 움직인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삐걱임이 남을지라도, 그 소리는 ‘살아 있다’는 신호일지 모릅니다. 금이 갔다고 해서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며, 손때 묻은 자리들은 오히려 보살핌의 기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실 때도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급하게 결론내리지 않으시고, 우리 안의 결을 더듬어가며 가장 약한 곳을 먼저 어루만지시는 분.

오늘 마음 어딘가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면, 언젠가 너무 세게 조여 금이 갔던 자리일 수도, 오래 미뤄두어 흔들리게 된 자리일 수도 있겠습니다. 기대가 무겁게 걸려 삐걱대는 관계, 말 한 마디가 뭉툭해져 생긴 어긋남, 스스로를 몰아세우느라 숨이 가빴던 날들의 자취가 떠오릅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미세한 소리를 생각해 봅니다. 지금 이대로도 사랑받고 있다는 낯설 만큼 고요한 소리, 그리고 조금만 보태면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소리.

철물점의 문을 나서며 종이봉투를 가볍게 흔드니, 안에서 서로를 받쳐 주는 소리가 작게 울렸습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도 그렇게 서로를 지탱하는 소리들로 채워지면 좋겠습니다. 말없이 옆에 서 주는 존재들, 눈에 띄지 않게 자리를 고정해 주는 손길,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은혜. 그 소리가 마음속 깊은 데까지 닿아, 다시 열리고 닫히는 일상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것을 조용히 느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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