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자의 숨이 식탁 위에 앉을 때

📅 2026년 08월 28일 07시 01분 발행

해가 저물 무렵, 부엌 불을 낮게 켜 두시고 주전자의 입이 조용히 숨을 고르기 시작합니다. 싱크대 거름망에는 쌀 한 알이 미처 떠나지 못한 듯 붙어 있고, 오전에 벗어 두신 고무장갑에서는 물 한 방울이 천천히 손가락 끝으로 옮겨갑니다. 냉장고 문에 붙은 자석 아래로 오래된 엽서가 반쯤 기울어 있고, 누군가 그린 고래 그림은 모서리가 말려 색이 옅어졌습니다. 하루의 수고가 그릇에 겹겹이 쌓여 있는 저녁, 주전자의 작은 떨림이 집 안의 가장 깊은 고요를 깨우는 듯합니다.

끓어오른 물이 컵을 데우면, 컵은 먼저 손을 덥히고, 그다음 마음을 조금 풀어줍니다. 오늘 놓쳤던 말들이 생각나고, 삼켰던 한숨이 따뜻한 김을 따라 조용히 떠오릅니다. 말하지 못했던 미안함도, 끝내 답을 듣지 못한 질문도, 김처럼 공중에서 모양을 바꾸다 이내 사라집니다. 소리내어 울지 않아도, 기쁨을 과장하지 않아도, 물의 온도만으로 전해지는 위로가 있습니다. 삶이 거대하고 당당한 모양만을 입어야 한다고 믿다가도, 주전자의 부드러운 숨 앞에서는 괜찮다고 여겨지곤 하지요.

성경은, 크고 놀라운 광경이 지나간 뒤에 세미한 소리가 들렸다고 전합니다(열왕기상 19장 12절). 오늘 저녁 제 마음에 그 세미한 소리는, 김이 뿜어 나오는 순간의 얇은 쉼표 같았습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다만 살아 있다는 사실이 내는 조용한 소리. 손에 든 컵을 한 번 내려놓는 동안, 그 소리는 집 안 구석까지 퍼져나가 날을 세운 생각들의 모서리를 둥글게 만져 줍니다.

이 시간이 되면 어머니의 부엌이 떠오르곤 합니다. 헝겊을 비틀어 물을 털고, 개수대에 기대 두던 그 자세. 그 손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항상 물자국이 둥글게 남았다가 조금 뒤 사라졌지요.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지만, 그 반복이 집을 지켰습니다. 오늘 제 손도 어느새 그 동작을 따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라는 것도 어쩌면 이와 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단한 문장을 찾아 애쓰지 않아도, 하루의 가장 작은 일을 부드럽게 반복하는 마음에서 은혜의 습관이 만들어지는 듯합니다.

따뜻한 김이 안경을 스치면 세상이 잠깐 흐려지고, 그 틈에 잊었던 이름 하나가 조용히 떠오릅니다. 안부를 묻고 싶었던 사람, 미처 감사 인사를 전하지 못했던 얼굴, 오래된 엽서처럼 기울어졌던 마음. 컵을 다시 들었다 놓는 사이, 서러운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같은 자리에서 자리를 바꾸어 앉습니다. 다 말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온기가 한 번 스며들면, 단단하던 마음도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풀어지곤 하니까요.

컵 바닥이 식탁에 둥근 자국을 남깁니다. 닦지 않아도 이내 마를 그 자국이, 오늘 우리가 살아낸 시간이 사람의 눈에 보일 만큼 남아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도 어쩌면 이런 자국일지 모르겠습니다. 큰 계획과 화려한 성과보다, 조용히 남았다가 사라지는 온기의 흔적. 그 흔적이 겹겹이 모여 한 사람의 하루가 되고, 그 하루가 모여 내일을 기다리는 힘이 됩니다.

오늘 밤, 주전자의 마지막 숨이 잦아들고, 부엌 불을 조금 더 낮추면, 집은 더 이상 무엇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얼굴을 띱니다. 아무 일 없는 듯한 집 한가운데, 말없이 앉아 있는 컵 하나. 그 곁에 머무는 당신의 숨. 하나님은 이런 장면을 사랑하실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이미 다녀간 것처럼, 식탁 위 온기가 오래도록 식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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