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깎이 곁에서

📅 2026년 09월 05일 07시 01분 발행

사무실 책장 모서리에는 오래된 손잡이 연필깎이가 나사로 단단히 고정돼 있습니다. 반들반들해진 손잡이는 수많은 회의를, 메모를, 기도를 통과한 손끝들을 기억하는 듯합니다. 오늘 아침, 짤막해진 연필 하나를 꽂고 천천히 손잡이를 돌려 보았습니다. 금속 이빨이 나무를 물어줄 때 나는 낮고 부드러운 소리, 실톱으로 얇은 나뭇결을 켜는 듯한 그 울림이 방 안에 둥글게 퍼졌습니다.

나선 모양의 깎인 나무가슬이 통 안으로 겹겹이 쌓입니다. 가까이 대면 은은한 향이 올라옵니다. 물기가 빠진 나무에서 나는 담백한 냄새, 그래파이트가 손끝에 묻어 남기는 미세한 회색빛. 연필은 조금씩 짧아지지만, 심은 점점 선명한 눈을 얻습니다. 가끔은 아까운 마음이 스치기도 합니다. 더 길게 쓰고 싶었는데, 더 많이 남기고 싶었는데, 이렇게 줄어들기만 하는구나. 그러다 문득, 길이 대신 방향을 얻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입니다.

나무를 깎는 힘은 거칠지 않습니다. 일정한 박자와 적당한 마찰이 있을 뿐입니다. 연필 속에서 감추어져 있던 심이 드러나듯, 삶도 천천히 다듬어질 때가 있습니다. 말아 두었던 사과의 말, 미루어 둔 안부, 한 번에 풀리지 않는 고민들. 그 사이에서 마음이 조용히 갈려 나갈 때가 있습니다. 회복이라는 이름 대신, 오늘은 ‘정리’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었던 중심에 닿아 가는 과정처럼 느껴집니다.

한때는 길게만 남기고 싶었습니다. 일의 목록도, 사람의 기대도,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하지만 연필이 길수록 선이 흐릿할 때가 있는 것처럼, 남김이 많을수록 마음의 선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온전히 듣고 돌아오는 밤, 오래 붙잡던 의견 하나를 내려놓고 나면 말끝의 촉이 조금 더 맑아집니다. 불편했던 몇 마디를 삼키고 나서 아침에 적어 내려간 문장은, 짧아졌지만 거짓이 덜합니다.

사람을 깎는 이는 누구일까요. 서로의 말 한마디, 나를 기다리게 하는 시간, 예기치 않게 찾아온 침묵 같은 것들. 그 어떤 것도 거친 칼이 아니라, 힘을 과시하지 않는 작은 연필깎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무리하게 베어내지 않고, 나선형으로 조금씩. 오늘 건네받은 사과 한마디가, 병실 바닥의 소독 냄새가, 오래 답하지 못했던 편지의 여백이, 마음의 단면을 얇게 깎아 밝게 만들어 줍니다. 어젯밤보다 오늘의 선이 분명해지는 것은, 그 사이에 지나간 시간의 손잡이 덕분이겠지요.

깎인 나무가슬을 들여다보면, 속살의 결이 고르게 빛납니다. 버려지는 조각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 나선들은 내가 어디를 지나왔는지 보여주는 조용한 연대기일지도 모릅니다. 얇은 띠마다 냄새가 다르고, 색이 조금씩 다릅니다. 수줍게 시작한 일의 첫 설렘, 오래 묵혀둔 오해의 그림자, 뜻하지 않게 받은 위로의 온기까지. 그 모두가 겹겹이 말려 하나의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손끝에 묻은 회색 가루를 훅 털어내자, 공기 중에 작은 별가루가 흩어집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로 옮겨가는 듯한 느낌이 남습니다.

어느새 연필끝은 가늘고 단단해졌습니다. 오늘 적을 첫 문장을 생각하다가, 한 이름을 떠올립니다. 며칠째 병문안을 다녀온 뒤, 마음에 남은 그분의 웃음. 이름을 적는 순간, 선이 종이 위에 맑게 놓입니다. 간절함이 아닌 차분함으로, 과장된 굵기가 아닌 적당한 두께로. 낡아진 나사와 반짝이는 심이 한 자리에 만나 만들어 낸 선. 겉은 닳아도 속은 새롭게 선을 긋는 이 작은 도구를 보며, 오래 들었던 한 문장이 속에서 가볍게 깨어납니다.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후 4:16).

오늘 하루가 지나면 연필은 더 짧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짧아진 만큼 선은 더 정확해질지 모릅니다. 조금 덜 말하고 조금 더 듣게 되고, 서둘러 끝내던 일을 잠시 멈추어 한 번 더 매만지게 됩니다. 남김이 줄어드는 대신 진심이 또렷해지는 일. 누구의 지혜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가만히 건네는 훈련 같습니다. 손잡이를 멈추고 연필을 빼내어 손바닥에 올려두었습니다. 체온이 스며들자, 까끌한 나무결 위로 작은 온기가 번집니다. 오늘 내 안의 심이 어디쯤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 이 온기만으로도 알 수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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