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6월 14일 07시 00분 발행
저녁 불이 막 켜진 복도에서 낡은 우편함을 열었습니다. 금속문이 가볍게 떨리며 오래된 소리를 냈고, 전단지 몇 장이 먼저 미끄러져 나왔지요. 손바닥만 한 흰 봉투 하나가 그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얇은 볼펜 글씨로 제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 있었는데, 획의 끝이 조금씩 떨려 있었습니다. 멈칫거린 그 흔적이 이상하게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부르며, 한 글자씩 더듬어 여기까지 걸어온 것 같아서요.
집에 올라와 의자에 앉아 봉투를 조심스럽게 열었습니다. 길지 않은 안부와, 오래전 나눈 말의 꼬리 같은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디가 아프다는 소식도, 급하게 도와 달라는 부탁도 없었습니다. 다만 “당신을 생각했습니다”라는 숨이 서툰 글씨들 사이로 번져 있었습니다. 글자 사이 여백이 넓어서, 그 빈칸에 그 사람의 하루가 잠깐 누워 쉬는 듯 보였습니다. 손글씨는 참 신기합니다. 맞춤법은 조금 비틀리고, 줄 간격은 들쭉날쭉한데, 쓰는 이의 걸음걸이와 숨 고르는 리듬이 그대로 묻어나지요.
요즘 우리의 하루는 번호표와 송장으로 정리되는 시간이 많은 듯합니다. 화면에는 주문번호가 떠 있고, 택배는 문 앞에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빠르고 편리하지만, 가끔은 이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숫자와 코드가 대신해 주는 자리에, 내가 누구인지가 흐려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봉투 위에 적힌 서툰 제 이름 하나가 방 안의 온도를 바꾸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떠올리며 시간을 들였다는 사실, 그 작은 천천함이 제 마음의 속도를 잠시 늦추어 주었습니다.
그 순간 오래전에 마음에 새겨 둔 한 구절이 조용히 살아났습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특별한 날만을 위한 말이 아니라, 사소한 저녁의 식탁 위, 아직 따뜻한 국그릇 옆에서도 들리는 음성처럼 느껴졌습니다. 잘한 날만이 아니라 서툴렀던 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제 이름을 부르셨지요. 괜찮다고 다독이는 말 이전에, 먼저 “너는 내 것”이라는 확인이 많아졌습니다. 그 확인 하나가 마음에서 불을 지피듯, 흐릿하던 오늘이 천천히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도시락을 건네주던 매점의 젊은 직원 이름표가 떠오릅니다.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던 경비원 아저씨의 성함도 생각납니다. 대화를 길게 나누지 못했어도, 이름을 살짝 불러드렸던 순간들이 있습니다. 짧은 호명 속에, 서로가 서로의 삶을 대충 지나치지 않았다는 표지가 남았습니다. 그 표지가 있었기에 어느 밤들은 덜 외로웠습니다.
봉투를 접어 책 사이에 끼워 두었습니다. 주전자의 김이 얇게 공중에 퍼지고, 테이블에 앉은 제 이름이 한동안 방을 데웠습니다. 오늘 제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이 있었고, 어쩌면 들리지 않게 제 안쪽에서도 누군가의 이름이 조심스레 불려졌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조용한 호명이 서로의 밤을 지켜 주고 있을 거라 믿으며, 이 편지를 보낸 이의 느린 글씨체를 마음에 잠시 더 머물게 해 봅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이름은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계속 밝혀져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오늘의 마지막 페이지가 조금 더 따뜻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