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7월 25일 07시 01분 발행
주황색 보안등 아래, 아파트 분리수거장은 저녁마다 작은 무대가 되곤 합니다. 빈 병이 서로 부딪히는 맑은 소리, 상자를 접는 바스락거림, 비닐이 비비는 미세한 마찰이 한데 섞여 조용한 합주를 이룹니다. 세제와 고무장갑의 냄새가 가볍게 감돌고, 택배차의 붉은 후미등이 천천히 지나가며 바닥에 얇은 빛의 선을 남깁니다. 그 사이, 작고 오래된 나무 서랍 하나가 벽에 기대어 있었습니다. 모서리의 칠은 일부 벗겨졌지만, 둥근 손잡이는 손때로 반들반들했습니다. 위에는 손글씨 메모 한 장. “가져가실 분. 아직 멀쩡합니다.” 글씨는 서둘러 썼지만, 한 획 한 획에 무심하지 않은 정성이 묻어 있었습니다.
서랍을 열어보지 않았는데도, 이미 한 번은 열어본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안쪽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약한 비누 향, 오래전에 붙였다 떼어낸 스티커의 잔상, 영수증 자국처럼 희미한 선들. 칸막이에는 연필로 그어둔 얇은 금이 남아 있고, 나무 이음매에는 가느다란 균열이 자리했습니다. 누구의 손이 그 손잡이를 붙들고 출근 전의 바쁨 속에 여닫았을까요. 어린 손이 몰래 사탕을 숨겼다가 곧 들켜 웃음이 났을지도요. 서랍은 누군가의 아침과 밤을 오래 건너왔을 것입니다. 오늘은 마침내, 주인이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은 날이 되었고요.
분리수거장은 버림의 자리이면서도, 묘하게 건네짐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서랍을 다시 보며, 그 얇은 경계를 생각했습니다. 헌 것이 되어 내려온 물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 출발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였을까요. “아직 멀쩡합니다.”라는 문장이 오래 마음을 붙들었습니다. 물건에게 쓰인 말인데도, 사람을 향한 위로처럼 들렸습니다.
우리 안에도 비슷한 서랍 하나씩이 있는 듯합니다. 정리하려다 미루어 둔 말들, 차마 버리지 못한 사진 한 장 같은 기억들, 바닥에서 구슬처럼 뒹구는 서운함과 미안함들. 때로는 스스로를 이곳 한켠에 내려두고 싶었던 순간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더는 쓸모가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요. 마음의 손잡이가 헐거워진 듯, 작은 소리로만 삐걱거릴 때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삐걱임 또한 우리만의 목소리라는 생각이 조용히 스칩니다. 누군가는 그 소리를 불편함으로 듣겠지만, 어떤 귀에는 오래된 장조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 떠오르는 한 구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리라.” 서랍 앞에 선 채 마음속으로 천천히 읊조리니, 이 말씀이 오래된 손잡이를 쥐어보는 하나님의 동작처럼 느껴졌습니다. 성급히 판단하거나, 서둘러 결론내리지 않는 손길. 안쪽 먼지까지 숨을 고르듯 바라보시는 눈길. ‘이 칸은 무엇을 담아왔는지, 어떤 날에 닫히고 열렸는지’ 묻지 않아도 이미 아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문득 마음의 속살까지 닿았습니다.
한동안 그 자리에서 등만 벽에 살짝 기대고 서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상자를 반듯하게 접어 끈으로 묶고, 누군가는 작은 병마개까지 떼어 모으고, 또 다른 누군가는 표시를 확인하며 고개를 기울였습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정리법이 있었고, 망설임의 모양도 달랐습니다. 누구도 크게 말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작별은 아주 작은 소리로 이뤄졌습니다.
밤이 더 깊어질 즈음, 서랍 앞에 낯선 발걸음이 멈추는 장면이 그려졌습니다. 메모를 읽고, 한 번 들어 올려 무게를 가늠하고, 다시 내려놓았다가, 이내 두 손으로 감싸 안는 모습. 그 집에 들여놓고 헝겊으로 한 번 문지르면, 칠이 벗겨진 자리마다 새 시간의 결이 얇게 번질 것입니다. 첫 번째 칸에는 수저가, 두 번째 칸에는 편지 봉투가, 맨 아래 칸에는 약봉지와 두꺼운 메모지가 차곡차곡 눕겠지요. 제자리를 찾아 눕는 물건들처럼, 우리 삶의 빈 칸에도 제자리를 찾아오는 순간이 분명 있었습니다. 오래전 ‘잡동사니’라 적어 둔 라벨 위에, 누군가는 조용히 ‘소중한 것들’이라고 덧써주는 때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 서랍의 문장이 내내 귓가에서 잔잔히 울립니다. 아직 멀쩡합니다.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릴 뿐입니다. 마음속에도 작은 쪽지 하나가 붙은 듯했습니다. 버려진 것이 아니라 건네지는 중이라고, 끝이 아니라 옮겨가는 시간이라고. 그래서 오늘 하루의 끝에서, 제 마음의 분류표를 다시 써 보았습니다. ‘버림’과 ‘보관’ 사이에 아주 가느다란 칸 하나를 더 적었습니다. 이름은 ‘기다림’. 꺼져가는 등불 같아 보여도, 그 칸 어딘가에서 불씨는 여전히 제 온도를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