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조율되는 마음

📅 2026년 10월 15일 07시 01분 발행

커튼 사이로 늦은 빛이 소예배실 바닥에 길게 누워 있던 오후였습니다. 숨을 고르듯 잔먼지가 천천히 떠오르고 가라앉는 그 조용한 시간에, 한 조율사님이 오래된 업라이트 피아노 앞에 앉아 계셨습니다. 피아노 뚜껑이 열리자 해묵은 펠트 냄새가 먼저 인사를 하고, 얇은 철현들이 정돈된 실처럼 반짝였습니다. 조율사님은 작은 소리굽쇠를 가볍게 두드려 귀에 대고, 입술을 꼭 다문 채 한 음을 오래 들으셨습니다. 그 표정이 유난히 정중해 보였습니다. 마치 지금 여기의 호흡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처럼요.

저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오늘의 제 마음도 거기 앉아 있는 듯했습니다. 하루를 살다 보면 큰 흔들림보다 작은 빗나감들이 쌓일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천천히 굽어지는 마음, 서두르느라 놓쳐버린 안부, 스스로에게 건 냉담한 한마디가 남기는 미세한 떨림. 악기처럼 우리도 조금씩 어긋나지요. 그래서일까요, 조율사님이 아주 작게 렌치를 돌릴 때마다 제 안의 소음도 같이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세게 치지 않았습니다. 한 음을 조용히 눌러 듣고, 다시 듣고, 아주 조금만 당기고 풀었습니다. 그렇게 ‘조금만’이라는 말이 방 안을 채웠습니다.

기준음을 맞추면 옆 음이 새삼스럽게 어긋나는 법이라 하더군요. 하나를 곧게 세우면, 다른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올 준비를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의 하루도 비슷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마음 한켠에 단 하나의 기준을 조용히 모셔 두면, 다른 감정과 생각들이 천천히 줄을 서는 때가 있습니다. 그 기준이 저에게는 자주 ‘평안’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신 말씀이 문득 떠오르니, 울림이 한층 깊어졌습니다(빌립보서 4장 7절).

조율이 끝나갈 즈음, 첫 화음이 방 안에 펼쳐졌습니다. 화음은 한 번에 커지지 않고, 물결처럼 겹겹이 번졌습니다. 벽과 천장, 오래 앉은 의자, 들고 들어온 가방의 손잡이까지 그 소리를 조금씩 받아 적는 듯했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요. 마음의 소리가 관계와 기억, 오래된 습관에 부딪혀 다른 결을 냅니다. 완벽함은 아니어도, 하나의 중심이 있을 때 제법 어울려 울립니다. 누구의 인생에도 따라 부를 수 있는 음이 있고, 따라 걸을 리듬이 있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조율사님은 마지막으로 피아노 안쪽 나무에 작은 연필로 날자를 적으셨습니다. 오늘의 손길이 여기에 닿았노라고, 겸손하게 메모를 남기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우리도 마음 한켠에 오늘의 날짜를 적어둘 수 있겠습니다. 오늘 어떤 숨이 지나갔는지, 어떤 생각이 들어왔다 나갔는지, 어떤 말이 저를 흔들었는지. 기록한다는 것이 거창한 다짐보다 때로는 더 고운 울림을 남깁니다. 메모처럼 가벼운 기억이 내일을 살리는 힘이 되기도 하니까요.

저녁 기도가 시작되자, 피아노는 새 음색으로 오래된 찬송을 받쳐주었습니다. 낡은 현이 새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 자리를 다시 기억했을 뿐입니다. 저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잊었던 중심을 작게 떠올리는 일. 마음의 나사를 한두 번만 돌렸을 뿐인데, 세계가 덜 시끄럽게 느껴지는 일. 그 사이로 들려오는 작은 울림이 있습니다. 그 울림은 설명보다 앞서오고, 설득보다 먼저 자리를 잡습니다.

여러분께도 요즘 그런 소리 하나가 있으셨는지요. 누군가의 웃음 사이로 스며든 안심, 잠자기 전 짧은 숨 고르기, 오래 미뤄 둔 감사의 문장 하나. 어쩌면 그 소리를 따라 오늘의 마음이 천천히 곧아지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일이면 또 어긋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조율은 완결이 아니라 과정이더군요.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계절과 온도, 마음의 날씨에 따라 다시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커튼 사이 빛이 조금씩 옅어지고, 방 안에 남은 건 사람들의 발소리와 피아노 속 따뜻한 나무 냄새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향을 들이마시며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음정이 완벽하지 않아도,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소리였을지 모른다고요. 불협 뒤에 오는 작지만 선명한 화음, 그 한 음이 마음을 오래 데웁니다. 그리고 그 온기 하나로 밤을 건너갈 힘이 생깁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자리에서, 소리는 내일도 다시 고요하게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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