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커버 위에 남은 작은 기포

📅 2026년 07월 14일 07시 00분 발행

마을 작은 도서관에서 봉사하던 늦은 오후의 공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습니다. 소독약 냄새와 오래된 종이의 숨결이 얇게 겹쳐 있고, 책상 위에는 가위와 자, 뭉툭해진 연필, 그리고 맑은 필름 롤이 놓여 있었습니다. 표지에 맞춘 크기로 필름을 자르고, 흰 속지를 조금 벗겨 투명한 면을 조심스레 펼치면, 얇은 빛이 표면을 스쳐 지나가며 책의 얼굴이 한 번 더 반짝였습니다. 그 순간마다 마음도 조금 새로워지는 듯했습니다.

가장 조심스러운 일은, 필름과 표지 사이에 들어간 작은 공기를 밖으로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힘을 주어 한꺼번에 밀어내면 오히려 주름이 생기고, 그 주름이 더 많은 기포를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헤라를 손바닥에 얹듯 부드럽게 잡고, 책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천천히 쓸어 보냈습니다. 손의 온기가 필름에 옮겨 붙는지, 거친 모서리도 차츰 말랑해졌습니다. 다 밀어냈다고 생각한 뒤에도, 어느 한 귀퉁이에는 늘 바늘끝만 한 기포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오래 두면 자연스레 스며 사라지곤 했지요. 그 자리를 지켜보며, 완벽을 서두르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커버를 씌우다 보면 책마다 남아 있는 흔적이 눈에 들어옵니다. 연필로 적힌 작고 둥근 이니셜, 빛이 닿아 옅어진 제목의 획, 표지 안쪽에 겹겹이 찍힌 대출 도장. 누군가의 여행 가방이었을지, 병원 대기실의 동반자였을지, 그 모든 시간이 종이결 사이로 숨 쉬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커버는 그런 자취를 덮어 없애지 않고, 다만 비바람을 조금 덜 맞게 해줄 뿐이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그런 투명한 덮개 하나가 필요할 때가 있지요. 상처를 지우려 하기보다, 먼저 바람을 줄여 주는 얇은 보호막 같은 것.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이 그날따라 낡은 책무더기 사이에서 조용히 깜박였습니다.

돌아보면, 마음의 표지에도 기포가 살곤 했습니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서운함, 단어로 다 못 담기는 그리움, 잠결에 번지는 불안 같은 것들. 단숨에 밀어내려 할수록 더 도드라졌고, 다짐과 의지로 눌러 붙일수록 까끌거리는 자리가 생겼습니다. 오히려 깊게 들숨을 들이켜고,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쓸어 보듯 시간을 건네 주었을 때, 기포는 작아지거나 자리를 옮겼습니다. 남아 있는 기포 하나쯤 덜어내지 못해도, 책은 여전히 제 이야기를 잘 읽히게 했고, 그 투명함은 제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도 그와 닮아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급히 잡아당기지 않으시고,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우리가 허락하는 속도로만 가장자리까지 다가오십니다. 서두름이 덜어낸 자리엔 따뜻함이 남고, 따뜻함이 자리를 잡을 때 비로소 표면이 펴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살다 만난 주름의 대부분은 틀린 삶의 증거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려 했던 흔적이었습니다.

오늘도 각자의 손에는 보이지 않는 필름 한 장이 들려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말로 다 담기지 않는 마음 위에 살며시 올려두고, 너무 세게 누르지 않은 채, 체온이 스며드는 속도로만 결을 맞추어 보는 상상을 해봅니다. 완벽하게 매끈하지 않아도, 이야기의 줄거리는 선명하게 읽혀집니다. 남은 작은 기포 하나가, 당신의 호흡처럼 고르게 오르내리다 어느 저녁 불빛 속에서 조용히 사라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책등을 쓸어 넘기던 손끝의 온기가 오래도록 기억되는 밤이길 바랍니다.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