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명 사이의 숨

📅 2026년 05월 05일 07시 01분 발행

점심 무렵을 지난 구청 민원실은 서류 냄새와 얇은 종이의 적막으로 가득했습니다.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바깥 소음이 짧게 들렀다가 사라지고, 전광판의 붉은 숫자는 묵묵히 다음을 가리켰습니다. 제 손엔 막 뽑은 번호표가 말려 올라가 있었고, 작은 프린터가 토해 낸 흰 띠 하나가 오늘 제게 약속처럼 쥐어졌습니다. 선명한 두세 자리 숫자. 아직 오지 않은 제 차례가, 언젠가는 도착할 것이라는 조용한 보증이었습니다.

창구 앞엔 투명 칸막이가 서 있고, 안쪽 직원의 목소리는 지친 오후에도 예의를 잃지 않았습니다. 체인에 묶인 볼펜을 잡고 서류 한 귀퉁이에 이름을 적는 사이, 전광판이 한 칸씩 넘어갑니다. 271, 272. 옆자리 의자에는 체크 재킷을 걸친 어르신이 봉투를 쥔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유모차가 멈춰 서 있었습니다. 아기가 말 없이 천장을 보며 손가락을 흔들자, 어머니가 미소로 대답했습니다. 사람마다 들춰 보이지 않는 이야기와 사정을 품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림은 처음엔 조급함으로 시작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묘하게 사람을 누그러뜨립니다. 번호표를 손에 쥔다는 건 누군가 나를 잊지 않았다는 작은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은 멈춰 있으나, 이 멈춤 또한 어떤 흐름의 일부라는 걸 인정하게 합니다. 그새 마음속에서도 숫자들이 하나둘 넘어갑니다. 당장 해결하고 싶던 문제들, 미루고만 있던 마음의 서류들, 아직 문장으로 만들지 못한 사과와 부탁들. 전광판의 붉은 빛이 한 번씩 깜박일 때마다, 제 안에서도 어떤 순서가 세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성경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도서 3:1)라고 말합니다. 민원실 전광판의 질서는 그 말씀을 엿보게 했습니다. 먼저 가는 숫자도 있고, 한참을 기다려야 열리는 창구도 있지만, 제 차례는 결국 제 자리에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속도를 빼앗지 않고, 내 속도도 재촉하지 않는 조용한 약속. 하늘은 종종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달래시는 듯했습니다. 서둘러 달려온 발걸음에 잠깐의 의자를 내어 주고, 말없이 숫자를 하나 건네며, “여기서 숨을 좀 고르라”는 신호를 보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띵동, 작은 소리가 울리고 제 번호가 불렸습니다. 서류의 모서리를 한 번 더 맞추고 일어섰습니다. 걱정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작만으로도 제가 이미 다음 칸으로 건너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구 넘어 건네받은 설명은 구체적이었고, 할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건 마음의 호흡뿐이었습니다. ‘아, 오늘도 내 이야기가 어디선가 이름을 얻고 있구나.’

민원실을 나서자 늦은 오후의 빛이 바닥에 길게 눕고 있었습니다. 주머니 속 번호표는 이미 쓸모를 다했지만, 이상하게 버리기 아까웠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종이가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들은 작고 확실한 목소리 같았습니다. 나의 차례는 잊히지 않는다는 말, 늦어진 것들이 결코 무효가 아니라는 위로. 누군가는 방금 막 시작했고, 누군가는 거의 끝에 와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전광판 아래서 각자의 시간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손에 남은 종이의 감촉을 몇 번 만져 보았습니다. 오늘의 숨은 그 얇은 숫자 사이에 고요히 놓여 있었던 듯합니다. 이름보다 먼저 들리는 벨소리처럼, 먼저 오지도 늦게 오지도 않는 어떤 손길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를 천천히 호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부름에 답하는 방법을 아직 다 알지 못해도,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신호음만은 분명했습니다. 그 소리를 따라 하루가 저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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