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밑창이 마르는 동안

📅 2026년 05월 03일 07시 01분 발행

오후 햇살이 기울 무렵, 시장 골목 끝 작은 구두수선대에 섰습니다. 유리 진열장 안에 반짝이는 못과 금속 고리가 가지런히 누워 있고, 좁은 작업대 위에는 솔과 칼, 본드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선공의 손이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가죽이 낮게 숨 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솔질 소리와 타카의 짧은 울림, 본드의 냄새가 섞여 하나의 오후가 완성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신발을 맡기니 수선공이 밑창을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습니다. 고무의 닳은 자리를 가리키며 조용히 웃습니다. “여기가 제일 많이 걸어오셨네요.” 걸어온 시간은 구두 밑에 먼저 적히는 법인지, 검은 밑바닥엔 얇게 패인 길이 생겨 있었습니다. 그는 접착제를 얇고 넓게 펴 바르고, 새 고무를 대어 누른 뒤 못 몇 개를 톡톡 박았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했습니다. “지금은 걸으면 안 됩니다. 조금 더 말려야 오래 갑니다.”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지금은 서둘러 나아갈 때가 아니라, 잠깐 멈춰 서서 마르는 시간을 통과해야 하는 때라는 뜻처럼 들렸습니다.

우리 마음도 어느 날 문득 밑창이 얇아져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사소한 말에 미끄러지듯 흔들리고, 오래 신은 신발의 가장자리처럼 말끝이 해졌습니다. 그럴수록 그럴듯한 포장으로 감추고 싶지만, 이상하게도 번지르르한 말일수록 더 미끄럽게 느껴집니다. 말 대신 기다림이 필요하고, 기다림 사이로 스며드는 고요가 접착제처럼 제 일을 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없이 앉아 있던 날들의 표정을 떠올리게 됩니다. 안간힘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슬픔의 모양이 조금 달라지던 순간들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어느 구절이 문득 스쳤습니다(로마서 10:15). 화려한 가죽이나 값비싼 브랜드가 아니라, 여러 번 덧대고 고쳐 신으면서도 여전히 걸어가는 발이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닳아버린 자리에서 새롭게 이어 붙여진 흔적들일지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밑면이 단단해질 때, 발걸음의 소리가 달라집니다.

옆자리에는 회색 모자를 눌러쓴 노신사와 알록달록한 운동화를 손에 든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속도의 삶이 같은 의자에서 잠시 숨을 고르니, 기다림도 조금은 덜 지루해 보였습니다. 수선공은 아이의 신발 코끝에 패인 홈을 쓰다듬고는, 얇은 패치를 둥글게 잘라 붙였습니다. 누구의 걸음도 가벼워지고 싶은 마음은 같다며 미소 짓던 그 순간, 교회 마룻바닥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발소리가 겹쳐 들렸습니다. 기쁨의 발, 조심스런 발, 돌아오는 발. 닳은 자리마다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이 예배의 일부가 되는 듯했습니다.

수선대 한쪽에는 오래된 장부가 놓여 있었습니다. 오늘의 수선 목록이 또박또박 적혀 있고, 색과 흠집, 굽의 모양 같은 메모가 작은 글씨로 붙어 있습니다. 이름보다 디테일이 주는 기억이 더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우리 삶도 화려한 표제보다, 작고 구체적인 흔적으로 기억될지 모릅니다. 기울어진 굽, 긁힌 앞코, 비에 젖어 물러난 가장자리. 그 세목을 아시는 분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덜 숨고 싶어집니다.

수선공은 걷는 습관을 본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바깥쪽이 먼저 닳고, 어떤 이는 앞코를 자주 긁는다고요. 그래서 사람마다 고무의 두께와 재질을 달리 붙입니다. 우리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닳습니다. 누군가는 배려하느라 마음의 안쪽이 먼저 얇아지고, 누군가는 서두르다 앞부분이 헤어집니다. 하나님은 그 모양을 아시고, 한꺼번에가 아니라 필요한 자리부터 덧대어 주시는 듯합니다. 그러니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보이는 오후가 오히려 소중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눈에 띄지 않는 한 부분이 조용히 단단해지는 날일 수 있습니다.

결제를 마치고 구두를 받아 들었습니다. 겉모습은 어제와 같지만, 손끝으로 밑창을 눌러 보니 묵직하고 든든한 감촉이 전해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이 새로워졌다는 사실만으로 발걸음이 달라집니다. 오늘의 기도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크고 빛나는 제목은 아니어도, 드러나지 않는 자리가 조금 더 버티는 일. 언젠가 누군가와 나란히 걸을 때, 서로의 발소리가 덜 미끄럽고 덜 거칠게 울리면 충분하다는 마음. 시장 골목에 가늘게 뜬 먼지띠가 햇빛을 타고 천천히 떠다녔습니다. 새 밑창이 마르는 동안 배운 침묵이 저녁까지 이어졌고, 그 고요가 내일의 첫 발을 조용히 받쳐 주는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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