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등을 고치는 오후

📅 2026년 05월 22일 07시 01분 발행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날, 마감이 가까워지자 서가의 윗면으로 늦은 햇빛이 길게 눕더군요. 먼지는 소리 없이 가라앉고, 책들은 제각각의 표지로 저마다의 나이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한쪽 구석 수선대에는 얇은 붓과 부드러운 헝겊, 밀전분으로 만든 풀, 자그마한 누름돌이 가지런했습니다. 찢어진 페이지, 헐거워진 책등, 모서리가 일어난 표지들이 조용히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책을 고치시는 사서 선생님은 먼저 찢긴 자리의 섬유를 살피고, 결을 맞추듯 종이를 나란히 붙여 주셨습니다. 풀은 과하지 않게, 하지만 지나치게 적지도 않게 얹혔습니다. 붓끝이 지나갈 때마다 종이는 한숨 놓는 것처럼 잔잔히 정리되었지요. 그다음엔 얇은 종이를 덧대고 누름돌을 올려 시간을 건넜습니다. 금세 나아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마르는 동안 기다림이 이어졌고, 일어났던 가장자리들이 천천히 자리를 찾았습니다. 수선된 자리는 예전의 매끈함과는 달랐지만, 그래서 더 분명하게 책의 역사를 드러냈습니다. 누군가의 손길에 닿아 읽히고, 또 읽힌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의 하루도 종종 그런 모양을 닮습니다. 성급한 말이 번져 얼룩이 지고, 마음의 모서리는 쉽게 일어나며, 문장 사이가 뜨기도 합니다. 완전히 새것이길 바라는 마음이 들 때가 많지만, 어쩌면 새로움은 때로 수선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이사야 42:3). 버림이 아니라 붙듦, 단절이 아니라 이어줌으로 다가오시는 분. 우리 인생의 책등을 잡고, 헐거워진 곳에 조용히 손을 얹어 주시는 분을 생각했습니다.

수선에는 반드시 기다림이 들어갑니다. 풀은 마르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사이 서두르면 종이는 금세 주름이 잡힙니다. 기도도 가끔은 그런 결을 닮았습니다. 거창한 말보다, 마음의 가장자리를 살피는 작은 숨,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는 정직한 고백, 어제 남겨 둔 부스러기를 조심스레 털어 내는 손길. 관계 역시 세게 눌러 붙이기보다, 적당한 압력과 시간이 함께해야 다시 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배웁니다. 밤새 누름돌을 올려 두듯, 말 대신 침묵이 무게가 되어 서로를 붙드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마음속에서 오래 덮어 두었던 페이지 하나가 스스로 펼쳐질지 모르겠습니다. 그 위에 조용히 손을 얹고, 급히 넘겼던 문장들을 다시 더듬어 읽다 보면,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길잡이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남은 흔적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기억이 되어, 다음 장을 더 천천히, 더 진심으로 열게 하지요. 책을 덮을 때 손에 전해지는 감촉이 약간 무겁게 느껴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사랑받은 것들, 고쳐진 것들은 원래 조금 묵직합니다.

하루의 끝에, 눈에 보이지 않는 누름돌이 우리 위에 얹혀 있는 듯한 평안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거창한 변화 대신, 풀처럼 은근히 스며드는 회복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고 있을지 모릅니다. 완벽하지 않은 책등으로도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오늘의 문장을 마치고 숨을 고르는 이 고요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천천히, 끝까지 읽어 가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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