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06월 09일 07시 01분 발행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싱크대 옆에 도마를 세워둡니다. 부엌 불빛이 낮게 내려앉아 나뭇결을 비추고, 물방울 몇 개가 미처 닦이지 못한 채 반짝입니다. 젖은 손끝으로 칼자국을 더듬어 보면, 얕고 깊은 홈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습니다. 오늘만의 흔적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여 온 밥상의 역사처럼 보입니다.
어떤 자국은 넓고 둥글어 무를 썰던 기억을 떠오르게 하고, 어떤 자국은 가늘고 섬세해 쪽파를 다지던 손놀림을 생각나게 합니다. 생일상에 올렸던 과일의 단면, 병문안을 앞두고 끓이던 미음의 온기, 늦은 귀가를 기다리며 끓인 라면의 소박한 냄새까지, 도마는 말없이 받아내고 감쌌습니다. 거친 칼날이 지나가도 불평하지 않았고, 따스한 그릇이 머물러도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순간이 조용히 스며들어, 나무 속에 작게 흔들리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흔적은 씻어도 남습니다. 아픈 일의 기록만이 아니라, 사랑이 지나간 자리도 흔적을 남깁니다. 남김없이 지우고 싶은 날이 있었어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남은 것들 덕분에 오늘의 제가 모양을 갖추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설픈 칼질로 만든 상처와 조심스러움이 어울려, 삶의 결이 깊어졌습니다.
가끔 너무 성급했던 날들이 떠오릅니다. 무언가에 쫓기듯 손을 놀리다 깊은 흠을 내고, 뒤늦은 자책이 한숨처럼 남던 때가 있었습니다.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미처 듣지 못한 말, 너무 빨리 내린 판단, 늦어버린 사과의 마음. 도마의 칼자국처럼 그 일들도 지워지지 않은 채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됩니다. 그 흠이 저를 작아지게만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요. 그 자국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넉넉해질 때, 저는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다정하게 움직이게 됩니다.
도마에 기름을 한두 방울 떨어뜨리고 부드러운 천으로 문지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푸석하던 결이 다시 살아나고, 오래된 자국과 새 자국이 함께 번져 은근한 무늬를 이루어 갑니다. 물에 약한 나무가 돌봄을 받으면 다시 단단해지듯, 우리 마음도 작은 배려에 힘을 얻습니다. 밤늦게 보낸 짧은 안부, 누군가를 떠올리며 끓인 국물 한 그릇, 끝내 턱끝에서 멈추었던 말들을 종이에 적어 보는 기도. 거창하지 않지만 천천히 스며드는 이런 마음들이 삶의 결을 드러나게 합니다. 소리 없이 스며들어 빛을 내는 방식이 참 고맙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 49:16)라는 말씀을 떠올립니다. 새김이라는 말이 오늘따라 다르게 들립니다. 지워버리기 위한 표가 아니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의 무늬입니다. 도마 위의 자국처럼 우리의 이름도 하나님께 그렇게 새겨져 있겠지요. 잘했다 못했다를 가르는 선이 아니라, 당신의 손바닥에 가까이 두고 싶다는 사랑의 선일 것입니다.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 한가운데가 잔잔해집니다.
흥미롭게도 도마의 자국은 다음 칼질을 조금 더 안전한 길로 이끌어 줍니다. 칼끝이 과거의 홈을 만나면, 손이 멈칫하며 속도를 조절합니다. 실수가 낳은 배움이 오늘의 조심성을 낳고, 그 조심성은 다정함이 되어 누군가의 하루에 닿습니다. 세월은 우리를 둔하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둥글게 깎아 갑니다.
거품이 가라앉고, 비누 냄새가 엷어지면, 도마에서는 은근한 나무 향이 올라옵니다. 무엇을 올려도 결국 자기 향기로 돌아오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제 향기가 있습니다. 억지로 내세우지 않아도, 한 번 더 어루만지고 한 번 더 기다려 줄 때, 그 향은 다시 살아납니다. 남에게 무엇을 증명하려 들기보다, 맡겨진 자리에서 차분히 숨을 고를 때, 마음의 무늬가 보입니다.
오늘도 이 나무 위에 몇 줄의 선이 더해질 것입니다. 기쁨 하나, 근심 하나, 뜻밖의 반가움 하나가 얇게 새겨질지 모르겠습니다. 그 선들 사이사이로 은혜가 배어들 자리가 분명히 있습니다. 어쩌면 눈에 잘 보이지 않겠지만, 손끝은 알아차리고, 마음은 기억할 것입니다.
도마를 세워두고 불을 끕니다. 어둠 속에 놓인 나뭇결이 조용히 쉬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손을 닦으며 오늘의 자국들을 떠올리면, 남는 것은 지워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받았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조용히 고개를 듭니다. 그 믿음이 내일의 손동작을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어 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하루가 또 하나의 조용한 기록으로 곁에 서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