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서랍 사이에 숨은 이름들

📅 2026년 10월 30일 07시 01분 발행

동네 작은 도서관에 들렀습니다. 오후 빛이 서가 끝자락의 먼지를 가볍게 띄우고, 오래된 나무 서랍들이 가지런히 숨을 쉬듯 놓여 있었습니다. 손잡이를 살짝 당기니 서랍이 스르르 열리고, 카드들이 얇은 잎사귀처럼 서로의 등을 기대고 서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적어둔 연필 메모가 옅게 번져 있고, 오래전에 바뀐 분류표가 테이프로 덧붙어 있었습니다. 한 장, 또 한 장 넘기다 보면 의외의 제목이 눈에 들어오고, 내가 처음 찾던 것과는 다른 책이 불쑥 마음을 붙잡습니다.

사서님은 한쪽에서 레일에 기름을 묻힌 천으로 살짝 문지르고 계셨습니다. 비뚤게 꽂혀 있던 카드를 빼내 자리를 확인하시더니, 조용히, 마치 사과라도 하듯 미소만 남기고 다시 꽂으셨습니다. 누구의 잘못을 묻지 않는 손길이었습니다. 질책 대신, 제 자리로 돌아가는 작은 안도. 그 광경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하루도 카드를 분류하듯 또박또박 나누어 적어 보지만, 막상 살아낸 시간은 고운 선을 넘어 서로 스며들지요. 기쁨과 서운함, 의욕과 피로, 사랑과 어색함이 한 서랍 안에서 섞여서, 어느 칸에도 또렷이 들어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떠올리면, 저는 가끔 이 카드목록을 생각합니다. 마음이 잔잔할 때는 제목이 분명한데, 서랍을 급히 닫았다 연다 하다 보면, 원하는 카드는 한 번에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다 우연처럼 손에 들어오는 다른 장, 그 끝에 적힌 참조표가 눈에 들어옵니다. ‘보: 두려움—신뢰’, ‘보: 상실—위로’. 삶도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 때가 있습니다. 당장 필요한 답을 건네주기보다, 다른 언어의 문턱에서 우리를 부드럽게 돌려 세우는 길잡이. 부정확해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더 정확한 안내 말이지요.

잠시 서랍 앞에서 멈춰 서니, 카드마다 누군가의 손길이 겹쳐 보였습니다. 대출 날짜에 남겨진 자국들, 서둘러 적다 지워진 흔적들, 한 번도 뽑히지 않은 듯 매끈한 카드까지. 사랑받았던 책, 오래 기다린 책, 늘 곁에 있으나 눈에 잘 띄지 않던 책. 우리 이름도 어쩌면 이렇게 서랍 속에 보관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절마다 다른 주제어가 붙고, 때로는 제목이 지워진 채로 오래 눕혀져 있다가, 어느 날 낯선 손이 조심스레 불러 올리는 이름.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속삭임처럼 남는 한 구절이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사서님이 서랍을 밀어 넣는 소리가 낮게 끝나고, 도서관 안 공기가 조금 더 고요해졌습니다. 오늘의 일도 저 서랍 어딘가에 갈무리될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은 분류, 간혹 잘못 꽂힌 카드, 뜻하지 않은 참조표까지 함께요. 어쩌면 우리를 가장 잘 아는 분의 손에는, 서랍의 순서보다 이름의 결이 중요할지 모릅니다. 그분은 서두르지 않으시고, 잊힌 카드도 버리지 않으시겠지요.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반드시 결론이 나야 비로소 안심되는 마음이, 서랍 속 종이카드처럼 잠시 제자리를 얻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늘의 언어로는 아직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손끝에 남은 종이의 감촉처럼, 우리 곁에 머무는 온기 또한 설명보다 먼저 다가옵니다. 그 온기를 기억하며, 각자의 이름을 다시 마음속 서랍에 살며시 꽂아 두었습니다. 내일 누가 그 이름을 부를지, 어떤 참조표가 길을 틀어줄지, 조용히 기다리는 오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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